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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Dec 14. 2020

엄마는 자식에게 두 번의 생일을 준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발달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하는 거였다


엄마는 내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너는 어떻게 컸는지도 모르겠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언니에 비하면 참 수월하고 무난하게 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의 내 모든 사진이 담긴 앨범이 언니 생후 백일 때까지의 사진을 모아놓은 앨범과 같은 크기인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건 특별히 내가 알아서 잘 컸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손이 덜 갔다는 애 치고 태어날 때는 나도 꽤나 요란한 편이었다. 내 생일은 엄마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운 십이월의 어느 화요일 새벽 세시쯤이었다. 엄마 뱃속에 오래 있었던 탓에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내 머리를 진공청소기 같은 기구로 빨아들여 꺼냈고, 3.9킬로그램의 우량한 딸을 낳느라 기운이 다 빠진 건지 엄마는 퇴원하는 길에 쓰러져서 다시 입원을 했었다고 들었다.


결혼이나 생일 또는 기일처럼 뚜렷하게 이름 붙이는 날이 아니더라도 첫 키스라든가, 입대라든가, 크게 싸우거나 맞은 기억 등 살면서 기뻤던 일, 힘들었던 일, 여러 가지 중요하고 인상적인 경험을 한 날을 우리는 오래 기억한다. 출산을 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열 달 간 자기 몸의 일부로 품었던 것이 숨풍 빠져나가기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살이 찢어지고 뼈가 벌어져도 안 나와서 결국 기계로 끄집어냈다니... 엄마가 묻지도 않았는데 수시로 내가 태어나던 날 이야기를 했던 걸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를 낳은 경험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아주 강렬한 엄마 인생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다른 여러 가지 경험과 출산이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엄마가 얼마나 모험적인 출산을 겪었든 결국 그 날은 '내가 출산한 날' 이 아니라 '내가 낳은 아이의 생일'이 된다는 점이다. 엄청난 특징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겪은 사건의 주인공이 바뀌고, 그 날 이후로 이 이야기는 새로운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거니까. 물론 철든 자식에게는 '생일은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는 날이다'라는 관점도 있게 마련이지만 그마저도 '자식을 낳느라' 고생하셨다는 전제가 붙으면서 출산의 고통을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장치 (그러나 매우 중요한) 중 하나로 만들어버린다. 이게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세상의 엄마들은 그러한 시점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기꺼이 수용하니까. "내 고생은 왜 기념 안 해줘!" 하면서 자녀 생일날 심통을 부리거나 서운해하는 엄마를 아직까지는 본 적이 없다. 여느 엄마처럼 평범하게, 우리 엄마도 본인의 그 특별한 출산 경험을 나의 탄생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치환하고 그 날의 주인공 자리를 나에게 내어 주었다. 매년 돌아오는 12월 3일은 오롯이 내 생일일 뿐이었고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축하를 받는 주인공은 나였다.




우리 엄마는 아주 세련되고 고상한 축하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진지하게 덕담을 건넨다던가 간지럽게 사랑 표현을 한다든가 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아침밥상에 미역국을 끓여내 놓고도 왜 끓였는지 말 한마디 안 하다가 현관문 열고 내가 집을 나서기 직전에서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빈아아아~ 생일 축하한다아아아~"라고 타령조로 한 마디 건네는 게 엄마의 방식이었다. 엄마는 분명 소녀처럼 귀여운 면도 있었고 우리는 친한 모녀였지만 텍스트로 축하를 주고받는 건 엄마랑 나 사이에는 너무 '오글거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게 그 '오글거리는' 생일 축하를 딱 한 번 엄마에게 받은 적이 있다.


눈이 펄펄 내리는 아침 30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부러지는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그런데 너를 낳아준 나에게 선물줘


간밤에 온 생일 축하 메시지가 꽤 쌓여있었지만 지금 부엌에서 덜그럭 거리고 있는 엄마가 대체 아침부터 무슨 메시지를 보낸 건가 하는 마음에 가장 먼저 카톡창을 열었다. 그리고 저 문장과 맞닥뜨렸다. 분명히 우리 엄마가 보낸 게 맞는데 너무 낯설었다. 일단 엄마의 축하를 문자로 읽어본 기억이 없었고, 똑 부러진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몇 번 들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또렷하게 문자로 적혀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왈칵 눈물이 났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왜 안 하던 짓 하고 그래" 하면 그만인데도 투병한 지 일 년 반이 넘어가면서 부쩍 통증이 심해졌다고 말하는 엄마가 왜 이러는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메시지는 엄마가 나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생일 축하 문자가 되었다. 엄마와 주고받은 이 메시지 창은 미리 캡처도 하고 백업도 해 두었지만 그래도 사라질 새라 휴대폰을 바꾸면서 모든 데이터와 와이파이를 차단하고 그 기기 속에 이 화면을 박제 해 두었다.


이 메시지가 특별한 것은 마지막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 메시지가 특별한 것은 마지막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에는 낯설었고, 엄마가 떠난 직후엔 너무 슬펐던 이 말들 중에서도 세 번째 문장은 해를 지날 때마다 여러 번 곱씹게 된다. 내방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직 눈도 뜨지 않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나를 낳던 날을 생각했던 건 아닐까. 서른두 살의 산모였던 엄마, 친정식구들은 바다 건너 멀리에 있고, 그래서 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한 채 해를 넘겼고, 심지어 남편도 일 때문에 곁을 지키지 못하고 혼자서 힘겨운 출산을 했을 당시의 엄마에게 누가 충분한 위로나 격려의 말을 해주기나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데 너를 낳아준 나에게 선물 줘’라는 말은 너무 먹먹하다. 그때 누가 우리 엄마에게 선물을 줬을까. 사는 동안 내가 선물이 되기나 했을까. ‘이걸 왜 낳았지’ 하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을까. 엄마가 지금 있다면 나는 앞으로 내가 맞이할 내 생일을 다 포기하고서라도 이 날을 엄마에게 오롯이 주고 싶었다. 엄마가 나한테 넘겨준 자기 인생의 기념일을 다시 엄마에게 돌려주고 엄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말이다.



삼십 년 남짓 살면서 생일을 축하해 주는 남자 친구는 있었던 때보다 없었던 해가 더 많았고, 축하해 주는 친구와 지인들도 많긴 하지만 해마다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게 당연하고 그건 내 선택이기도 하니까 아무렇지 않다. 그러나 생일 기분 치고는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이 결핍의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명확한 정답을 알지만 말하는 순간 너무 분명한 사실이 되니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겠다. 다 있고 한 가지만 없을 뿐인데 절대로 완전해질 수 없고, 그래서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기분이 앞으로도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매 년 건너뛰고 싶을 것 같다.

2016년 12월 3일



그렇게 나는 내 생일을 다시 엄마에게 돌려주었다. 매년 겨울의 초입에 돌아오는 내 생일에는 설레거나 기쁘기보다는 그저 엄마 생각을 많이 한다. 꼭 나를 낳았던 엄마의 수고 같은 걸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또 내 중심의 생각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엄마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한다. 엄마가 태어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생일을 돌려받은 엄마는 나에게 또 다른 생일을 하나 주었다.



언젠가 잠 안 오는 새벽에 홀로 생각하다 두려워 울었던,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당연한 것들, 물과, 공기와, 바람과, 햇빛 따위의 것들이 없어지는, 그것들 없이 살아야만 하는 세상'이 오늘 지나고 내일 눈 뜨는 순간부터 펼쳐질 것만 같다. 알아. 그런 건 아니라는 것. 그렇지만 그냥 그런 느낌.

2016년 6월 8일       



엄마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이전과 같지만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건 이 세상을 처음부터 구성해 온 중요한 요소가 어느 순간 완전히 빠져버린 것과 같았다. 공기가 없는 세상을 한 번도 겪어본 적 없고, 그래서 상상할 수도 없듯이 엄마의 부재 이후에 내가 겪은 상황과 감정은 이전에는 감히 그려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때마다 이제껏 살면서 쌓아온 나름의 생활기술과 경험치가 초기화된 느낌을 받았다. 내 세상만 물구나무를 선 것 같은 상태에서도 변함없는 일상을 이어나가야만 한다는 걸 인지한 순간 나는 내 삶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엄마의 죽음을 기점으로 나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발달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하는 거였다.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정말 이상하고 이상한 일이 많아서 오늘은 조촐하게나마 이 특별한 날을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 두 살 되기까지 잘 살아온 내가 장하니까. 단 것을 안 먹으면 금방 건강해질 것처럼 모질게 끊었던 엄마의 세월도 보상받을 겸 혼자서 다 먹어치울 것이다.  

2018년 3월 9일


엄마 관련한 기념일 중에서는 아직도 엄마의 생일이 가장 중요한 나에게, 엄마의 기일이란 사실 나와 관련된 기념일이다. 이제껏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향해 첫 발걸음을 뗀 날, 그러니까 엄마가 내게 준 두 번째 생일인 셈이다. 일단 시작은 되었지만 쉬운 건 하나도 없다. 나는 아직도 엄마 물건이 가득한 방을 어떻게 청소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전에는 엄마가 대신 받았을 아빠의 등쌀을 어떻게 받아쳐내야 하는지 몰라 사사건건 부딪친다. 초면에 엄마의 신상이나 안부를 묻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도 여전히 연구 중이고 사는 동안 엄마가 정말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고 그때마다 엄마가 없다는 걸 직면하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바심 내진 않는다. 두 번째 생일로부터 나이를 세면 아직 만 다섯 살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 일 뿐이니까. 해 바뀌면 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 될 우리 조카도 아직 못하는 게 많은데 내가 그보다 더딘 건 당연하다. 두 번째 성장발달에는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기뻐해 줄 사람이 없으니. 모든 것은 나 혼자만의 몫이다. 그러니까 응원도 격려도 나 스스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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