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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l 07. 2021

나는 흰머리가 두렵지 않아

기쁨과 슬픔도, 자신감과 두려움도 머리 때문에 얻거나 잃는 건 아니니까


어릴 때 사진으로 먼저 본 외할머니는 친할머니처럼 거뭇거뭇한 그레이 헤어가 아니라 양털 같은 순백의 하얀색 머리를 하고 계셨다. 그땐 그저 '우리 외할머닌 산타클로스만큼 연세가 많으신가 보다' 했는데, 우리 엄마가 사십 대 정도 되었을 때 뿌리부터 진군하듯 일제히 올라오는 백발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게 피할 수 없는 모계 유전인자임을.


머리색이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사실 인상의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라서, 흰머리가 올라와있는 엄마와 자연갈색으로 전체 염색을 한 엄마는 나이차가 십 년은 족히 나 보였다. 그래서 엄마는 주기적으로 흰머리를 가리기 위한 염색을 했고, 바르는 셀프 염모제가 나오고 나서는 집에서도 매우 능숙하게 염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중요한 자리가 있을 때는 하루 전에 미용실에 가기도 했다. 내가 볼 때는 늘 같은 색 계열이라 편차가 크지 않은 것 같은데도 어떤 날에는 색이 잘 나왔다며 기분 좋아했고 어떤 날에는 현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머리색 좀 보라며 씩씩거리는 날도 있었다. 예민함과는 거리가 먼 우리 엄마로서는 아주 이례적인 애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결과물을 위해 한 군데의 샵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었다. 잘 가는 동네 미용실 몇 군데가 있긴 했는데 실력도 가격도 다 고만고만했고, 엄마는 그날의 외출 동선과 휴무일, 그리고 기분 따라 랜덤으로 머리를 하러 갔던 것 같다. 염색하는 면적은 언제나 비슷해서 어딜 가나 가격은 이만 원. 대략 염색 서너 번 정도를 하면 뽀글뽀글 펌할 타이밍인데 그것도 역시 이만 원. 머리 상할까 봐 둘을 한꺼번에 하는 일은 없으니까 엄마가 미용실에 가면 결제금액은 항상 이만 원이었다. 꾸미는 데 돈 쓸 줄 모르는 엄마가 자기 치장을 위해 지출하는 거의 유일한 항목이었고, 그렇게 거금 이만 원을 머리에 투자하고 들어오는 엄마는 설사 머리색이 잘 나오지 않았을지언정 어딘가 신나고 들떠 보이곤 했다.


난 우리 엄마가 빼어난 미녀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엄마에게 '할머니'라는 말이 어울리게 됐을 무렵부터는 우리 엄마가 참 우아하고 고상하게 나이 먹었단 생각을 가끔 했다. 염색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면서 엄만 흰머리가 신경 쓰이는 듯했지만 나와 언니를 포함 많은 사람들은 백발이 잘 어울린다, 백발이 너무 멋지다, 심지어 이전 헤어스타일보다 낫다는 말을 자주 했다. 물론 진심으로. 아빠가 엄마를 묘사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을 빌어, '사치도 할 줄 모르던' 여자였지만, 몸에 걸치고 지닌 것에서 싸구려 티 나는 게 없었고, 똑똑하고 고상한 구석도 없지만 마지막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늙도록 부하고 존귀한' 모습으로 살다가 떠났다.

2016년 4월 5일


혈액암으로 투병하셨던 친할머니의 주치의 말에 따르면 백혈병의 가장 유력한 발생원인이 지속적인 농약 또는 염색약 노출이라는 게 학계의 견해라고 했다. 할머니 간병할 때 들었던 그 말이 마음에 남아있었던지 엄마는 본인이 암 진단을 받자마자 이제부터 염색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몇 달 되지 않아 엄마의 머리는 하얗게 뒤덮였다. 분명히 머리색 때문인데 나는 마치 병 때문에 엄마가 순식간에 늙은 것 같아 맘이 쓰였다. 간혹 가다가 머리색만 보고 엄마를 노인정에 다니는 어르신 취급하거나, 심하면 우리 할머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기에 받아치지도 못해서 부글거리고, 나 혼자 들은 말이었는데도 비슷한 말을 자주 들을 엄마 생각에 끙끙 앓았다. 하지만 속상해만 하기에는 그 백발이 엄마에게 너무나 멋지게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의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이 화제가 된 적 있지만 우리 엄마는 그보다 몇 년이나 먼저 보여주었다. 별다른 꾸밈없는 백발이 멋스러울 수 있고, 새하얀 머리가 웃는 얼굴을 더 환하게 밝혀줄 수도 있다는 걸. 엄마의 흰머리가 주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나는 우리 엄마 딸다운 선택을 하기로 했다.  


엄마의 치료가 다 끝날 때까지 미용실에 가지 않기로.


어떤 결심의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머리를 만질 때가 되었는데도 계속 미루고만 있는 내 마음을 파고들어 보니 그 이유는 분명 엄마에게서 온 것이었다.


우선 머리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실 엄마의 암 진단 몇 개월 전에 인생 첫 염색을 했다가 뿌리 염색이라는 귀찮은 일을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염색인들의 부지런함에 짐짓 놀랐던 터였다. 하지만 다달이 염색하는 걸 일이자 낙으로 삼던 우리 엄마가 그 낙을 잃고서도 전혀 침울하거나 예민하지 않다는 점, 엄마의 낙천함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을 보니 머리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게 내게 더 기쁨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엄마가 완치되고 나면 다시 염색을 하기 시작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완치의 확신보다는 염색의 확신이 더 컸지만 어쨌든 엄마가 다시 염색을 하려 할 때 같이 미용실에 가서 뭐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가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머리에 신경 쓰지 않는 방식으로 신경을 쓰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기부를 위해 엄마의 1주기를 보낸 오늘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잘라내는  자체는 생각보다  느낌이 없었는데 지난 3 동안에 있었던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엄마의 투병과 부재는 물론 가장  일이지만 그밖에  울리고 웃게 했던 많은 일들, 지난 직장들, 여행들과 깨달음들,   어간에  인생에 들어온 사람들...  모든 것들이   가볍게 다가왔다.

 1 전쯤 ' 슬퍼요?'라는 질문을 받고 어이가 없어서 분노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너무 슬퍼서  말이 그렇게 야속했나 보다. 그렇지만 지금은 정말 아니다. Because my mom would definitely be proud of me. 그밖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되네. 그래서 머리를 자르나 .

모쪼록 아픈 어린이들이 많이 웃고 마음 편해지길. 건강하렴.

2017 3 11


엄마의 투병기간과 그 이후 열두 달을 더해서 삼십육 개월 꼬박 기른 머리카락을 뭉텅 잘라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로 보냈다. (참고로 이 협회에서는 2019년 2월부로 더 이상 모발 기부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염색과 파마를 하지 않은 15센티미터 이상'이라는 수식어만 덜렁 붙이기에는 너무 특별한, 3년간의 모든 이야기들이 다 담긴 머리카락이었다. 애초에 기증을 위해 길렀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적절하고 의미 있는 용도가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의 1주기를 보낸 주말에 기쁜 마음으로 미용실에 갔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머리에 초연한 삶을 사는 중이냐고? 악성 반곱슬인 내 삶의 질에 볼륨 스트레이트가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다. 내 머리는 그 삼 년간의 휴지기 이후 지속적으로 이런저런 실험을 당하는 중이다. 더 나이 먹으면 머리칼에 힘이 없어진다고 해서 올해는 난생처음 전체 탈색도 해 봤다. 남들 중학교 때 하는 짓을 나이 두 배 먹고 하려니 품도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지만 사실 헤어스타일이든 머릿결이든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자랑도 아니고 흉도 아니기에 이것저것 두려움 없이 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미용실에 전혀 안 가는 것과 전체 탈색을 하는 건 따지고 보면 같은 결이라고 우겨본다.


엄마의 외형적인 특질을 많이 물려받은 나도 이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해가 갈수록 부쩍 많아지는 흰머리가 이쪽저쪽 가르마를 옮겨 타는 것만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때가 머지않아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엄마 딸인 내가 흰머리 한올에 파르르 하며 스트레스받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만 원짜리 엄마 머리의 열 배정도 되는 머리도 쫄지 않고 할 수 있지만 천 원에 앞머리 자르면 돈 굳었다며 기뻐하기도 한다. 기쁨과 슬픔도, 자신감과 두려움도 머리 때문에 얻거나 잃는 건 아니니까, 백발이든 빡빡머리든 그거 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엄마가 몸소 보여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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