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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l 29. 2021

기다리지 좀 마 내가 언제 갈 줄 알고

잘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언제든 엄마를 만나면 안길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기다리지 좀 마. 내가 언제 갈 줄 알고!”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오분마다 "아들(애들) 안 오나"라고 묻는 아빠의 성화에 엄마는 빨리 들어오라는 연락을 일분마다 하고, 짜증 섞인 말을 던져보지만 별 수 없이 그때부터 마음이 조급 해 지면서 나를 재촉하게 된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반가움과 고마움 이전에 적잖은 부담. 내 마음대로 늑장 부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고, 상대방이 힘든 것도 원치 않으니까 기다리고 있는 사람만 자꾸 탓하게 된다. 지하철역 앞에 나와 있다는 엄마에게 분 단위로 위치를 보고하면서도 "그러니까 누가 나오래" 가시 삐죽 나온 말을 하는 나에게 엄마는 지지 않는다. "가시나가 밖에서 지금까지 뭐하노". 왜 약속도 안 하고 맘대로 기다리냐고 한바탕 할 준비를 했는데, 마주치자마자 무거운 짐 하나 빼라며 가방에 손부터 집어넣는 엄마에게 더 이상 아무 말 못 하고 어두운 골목길을 다정히 걷다가 또 툴툴대며 말한다.


"내가 알아서 들어갈게 나오지 좀 마. 골목에서 나쁜 놈 만나도 내가 엄마를 지키지 엄마가 날 지켜주겠어”


엄마가 아프기 전까지 나의 늦은 밤 귀갓길 풍경은 이와 비슷했다. 집에서 10분 거리 초등학교도 등하굣길도 위험하다는 건 아빠의 생각이었지만, 정작 그 길을 6년 내내 같이 다닌 건 엄마였다. 중고등학교 때도 항상은 아니었지만 학원 갔다가 늦은 귀가할 때는 늘 엄마가 멀찍이까지 데리러 나와서는 가방 속에 제일 무거운 책 한두 권을 자기 손에 옮겨 들곤 했다. 가방 무겁게 들면 키 안 크고 어깨도 굽고 허리 아프다며. 내 키는 그때 이미 170이 넘었었는데.


 엄마는 그렇게  책가방을  들어서 안달일까. 나랑 같이  보러 가지 않으면 마트에서 생수  병도 혼자  들고 오는 엄마가, 어제 교회 체육대회에서 달리기   했다고 후유증으로 허리도  펴고 하루 종일 골골대는 엄마가,  내가 밤늦게 돌아올 때는 굳이  앞까지 나와서 가방을 내리라고, 들어주겠다고 말도  되는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다. 내가 암만 녹초가  날일지라도 엄마보다 힘이 없을까 . 결국 노트북 가방이라도 들어주겠다고 뺏아가는 엄마는   말린다. 자기 책가방을 대신  엄마랑 팔짱 끼고 걸어오는 초등학생을 보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면서, 코앞에 있는 초등학교까지 6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데려다주고 데리러 왔던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는 내가 15년째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는가 보다. 이제는 가방  개에 짐을 나눠가지고 다녀야겠다. 집에   엄마가 가방을 달라고 하면  중에 가벼운 걸로 순순히 하나 줘야지. 그리고 사이좋게 팔짱 끼고 들어와야지. 우리 엄마는  죽어도  가방을 들어야 속이 시원하니깐.

 2010 5 6 


대학생, 대학원생 시절을 지나 직장 다닐 때도 가끔씩 내 늦은 귀갓길에 마중을 나오던 엄마는 암투병을 위한 몸 관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메시지로 그 일을 대신했다. 야근을 하거나 저녁 약속이 있는 날 조금 늦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빈, 언제 와’라는 메시지는 언젠가부터 잔소리가 아니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엄마의 부탁처럼 읽혔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기운이 떨어지는지 엄마는 내 귀가 전에 잠들어 있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나는 집에 온 것을 확인이라도 받는 듯 불 꺼진 안방에 살짝 들어가, 옆으로 누워 잠든 엄마 얼굴을 보고 나서야 딸깍 하고 방문을 닫았다.


엄마랑 보낸 문자는 내내 '언제 와'투성이다. 때론 담담하게, 때론 격하게 내 귀가에 맘 쓰는 엄마의 문자를 모아서 보니 마음이 쓰렸다. 난 대체 어떤 딸이었던가...  

2014년 10월 11일


나쁜 꿈을 꾸는지 잠꼬대를 하는 엄마를 안아서 다시 재웠다. 우리 엄마는 왜 먼저 날 안아주는 법이 잘 없지. 앞으로 내가 상딸 (주석: 상남자 비슷한 거)처럼 안아줘야지. 매일.  

2014년 12월 21일


그렇게 내 나이 서른을 기점으로 엄마와 나의 돌봄 관계는 역전되었다. 엄마가 잘 먹는지, 잘 자는지, 아프거나 불편한 데는 없는지, 또 하고 싶은 건 없는지를 살피는 건 꼭 병 때문이 아니라도 내 역할로 넘어오는 게 자연스러운 나이였지만, 반복되는 입퇴원과 검사 때마다 우리 엄마는 환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고, 그때마다 이 보호자로서의 역할 교환을 더 먼저, 자발적으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은근하게 마음을 짓눌렀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내내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던 것도 아니었다. 암투병이란 건 마라톤 같은 거니까 초반에 소진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어쩐다 하는 말을 어디서 주워듣고 너무 내 페이스를 잘 지키면서 많은 역할과 책임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뤘다. 마라톤 선수들도 세 시간 가까이 전력을 다해 질주하고 결승점을 지나면 엎드러 쓰러지는데, 엄마가 떠나고 난 뒤에 나는 힘을 다해 달려보지도 못하고 실격당한 선수 같은 심경이었다.


종일 엄마의 곁을 지키면서 모처럼 여유 있게 얘기도 하고, 일박 이일 놀러 온 것처럼 병원 내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나름 재미도 있는데 간호사 언니가 엄마 이름을 부르면 어느 한순간 '내가 엄마의 보호자'라는 사실이 자각되곤 한다. 어딜 가도 내 보호자는 엄마였는데, 근 30년 만에 역전에 성공(?)했다. 내가 믿음이 부족하여 엄마에게 보내는 100년의 편지 수신 일은 겨우 5년 후로 설정하긴 했지만, 나는 이 역전된 보호-피보호의 관계가 앞으로 30년간 유지되는 것을 꿈꾼다. 솔직히 그래야 셈이 맞지 않습니까, 하나님!  

2015년 1월 13일


엄마가 내 보호자였던 시절의 딱 절반만큼 이라도 되갚을 시간이 주어졌으면 하고 시간을 세며 간절했을 때가 있었다. 내겐 기회가 없었고 벌써 멀어져 버린 이야기. 다른 사람에겐 넉넉한 관용이 유독 가족한테만 없는 나란 인간을 너무 잘 아셔서 그러신 걸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주어진 시간에 하고 싶은 걸 다 못 해서 지난 뒤 마음에 구멍이 훅훅 뚫리는 일은 내 평생에 그만하고 싶다. 직구로 바로 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이 성미는 어느 정도 천성이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통제불능에 이르렀다.              

2018년 2월 1일


잘 지내다가도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건 사실 큰 영역보다는 작지만 중요한 것들, 여태 엄마가 챙겨줬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에서였다. 이를테면 여행 갈 때 들고 갔다 온 캐리어의 바퀴를 닦는다든가, 그날 신은 스타킹을 그날 바로 빨아놓는다든가, 오늘이 아파트 재활용품 버리는 요일인지 아닌지 체크한다든가 하는 일들은 인수인계도 없이 내 몫이 되어버렸고, 그걸 익히는 게 크게 힘들거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마지막까지 엄마에게 의존했던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엄마가 정말 보고 싶었다. 엄마가 다시 돌아와 이런 일들을 대신해줬으면 하는 게 아니라, 이런 일들을 시켜서 미안했다고 한 번은 말하고 싶었다. 떠나보내고 나서야 느끼게 된 이런 감정들을, 관심도 없을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게 아니라 당사자인 엄마가 알아들을 수 있게 딱 한 번만 말할 수 있었으면 했다. 아빠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꿈에서 우리 엄마를 봤노라고 말할 때마다 그랬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긴 했지만 정작 자기 딸내미 꿈속에는 한 번도 찾아와 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했다. 그러면서도 어느 날 밤 불시에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할 말을 준비해야지 하고 생각날 때마다 노트에 메모 해 두기도 했다.


캐리어를 들고 며칠간 집을 비웠다가 빈 집에 들어오는 것. 이제 익숙해지도록 해야겠지만 빨랫감을 꺼내서 돌리고 가방을 정리하다가 또다시 슬픔이 몰려왔다. 밖에 돌아다녔던 가방이라고 캐리어 바퀴를 걸레로 닦던 엄마는 이제 없고, 난 여전히 그걸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저 바퀴는 저 상태 그대로 있다가 제 수명을 다하겠지. 냉장고는 떠나기 전이랑 똑같고, 버릴 것만 더 늘어있다. 스무 살 남짓해서 집 떠나 서울에서 자취 생활하는 애들은 나보다 훨씬 먼저 그렇게들 산다고 했다. 그래, 엄살 부릴 거 없지. 결혼을 하고 애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된 지 몇 년 짼데.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슬픈 건 슬픈 거다. 엄마 보고 싶다. 이상해. 아직도 다 거짓말이라고 누가 말해준다면 '정말 감쪽같이 속았다'라고 말하며 등짝을 때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2016년 6월 19일  


집에 들어와서 손만 씻은 채 저녁을 좀 때우고, 재활용품이랑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갈까 말까 고민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새 잠들었는지 깨어보니 이 시간이다. 괘종시계 종이 네 번 울리고, 온 방과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데 아무도 날 깨운 사람은 없었네. 빈 집이라는 게 새삼 다시 느껴진다. 재활용 쓰레기는 지금 나가지 않는 이상 일주일 다시 기다려야겠지. 기회를 놓치면 아무도 대신해 줄 사람이 없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불을 다 끄고 방으로 들어와 눕는다. 기상까지 세 시간. 야무지게 자야지.  

2016년 6월 21일


속절없는 시간들이 지났다. 엄마가 떠난   5년이 훌쩍 넘었고, 그동안   번도 엄마를 꿈에서  적이 없다. 이제는  외워버리다시피  몇몇 영상 속에 영원히 멈춘 엄마의 모습은 아무리  상상력을 다해 보아도 새롭게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그래도  번쯤은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아직 가지고 있을  정채봉 시인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읽은 적이 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엄마가  세상에  5분만이라도 휴가를 나올  있다면, 엄마  속으로 들어가 눈을 맞추고, 만지고, 불러보면서 세상사 억울했던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거라는 내용의  시는 띄어쓰기 하나까지 정확하게  마음 같았지만,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결국  번도  봤던  분명한,  시를 지을 때의 시인의 마음이 느껴져 조금 다르게 읽힌다. 정채봉 시인이  세때 지은 시인지는 모르지만 나이가 많든 적든 엄마라는 울타리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꽤나 어른인 척하는 사람도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엄마를 보호자로 생각하고 있고,   나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언제든 엄마를 만나면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크게 엉엉 울면서.


엄마가 보고 싶다. 아빠 꿈에는 어제도 나오고 그제도 나오고 벌써 몇 번이나 나왔다더니. 나한텐 코빼기도 안 비치네. 아무래도 나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마음으로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꿈에서 엄말 보고 깨어났는데 불러도 엄마가 없으면 그게 더 슬플 거야. 그러니까 그냥 엄만 동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봐야겠다.

2016년 3월 31일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집에 있는 물건을 보면 생각나곤 하는 단계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고 그걸 단련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 요새 조카가 언니랑 떨어지기만 하면 '엄마 보고 싶어-' 하고 엉엉 우는데 그때마다 '이모도 엄마 보고 싶어' 하면서 엄마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전혀 새롭고 또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다.   

2017년 4월 13일


오후께 옆 팀 과장님이 나눠주신 간식은 트루먼쇼 같은 극적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먹고 냉장고에 남겨두었던 게 도라야끼 반쪽이었는데, 엄마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 앞에서 꺼이꺼이 울게 만든 바로 그 도라야끼를 (엄마 기일인) 오늘 받다니. 요새 어떤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팥을 좋아한다고, 마치 내 꿈에는 한 번 나타나지도 않는 게 미안해서 보낸 것처럼.  

2018년 3월 9일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가 꿈에 오지 않는 건 첫째로 내가 워낙 꿈을 잘 안 꾸는 사람인 까닭이고,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니까 내가 아직 엄마를 무의식 영역에 밀어 넣지 않고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뇌과학이나 심리학적으로 말이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엄마가 언제 가겠다 말도 한 적 없는데 혼자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기다리지 좀 마. 내가 언제 갈 줄 알고!"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재촉하는 거 아니고. 마음 내키면 오라고. 다른 사람들 꿈에 열 번 나올 때 나한테 한 번 정도. 그냥 내키면.


38.4도의 열을 달고 출장 가는 비행기를 타던 , 엄마는 그러고 어떻게   시간 비행기를 타느냐고 펄펄 뛰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생기 있던 마지막 모습이다. 마지막 힘을  해서 나를 걱정하고,  걱정하고, 그렇게 걱정했지만, '혜빈이는 걱정 없다' 말을 언니한테 남겼다 한다. 내가 이제껏  피운 것이 무엇이든, 앞으로의 열매가 무엇이든, 우리 엄마의 걱정이 거름이다.  같은 우리 엄마는 그렇게  거름이 되었다.
-김진호의 노래 <가족사진> 듣고-

2016 3 23


하지만 어려울 것 같다. 사는 날 동안 내 걱정을 다 하고 마지막에 이제 내 걱정은 없다고 말하고 간 엄마니까. 아빠 꿈에 종종 나타난다는 걸 보면 아무래도 못 미더운 사람들한테만 찾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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