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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l 25. 2021

믿었던 우리 엄마가 속물이었다니

혼자만의 생각일지라도 최소 엄마의 지지를 받고 있다

지난  년간 해오던 일을 작년  부로 그만두었다. 퇴사가 아닌 낯선 직무로의 이동이긴 하지만 대학원 전공부터 경력을 나름대로 이어온 나로서는 직종을 바꾸는 것에 준하는  변화였다.  행동이 생각에 앞서는 나답지 않게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러  숙고했지만 결심은 바뀌지 않았고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다. 연초 새로운 시작과 함께 과거의 기록들을 돌아보다가, 업무 때문에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 절정이던 때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고민을 시작했던 무렵에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는데,  떠나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어떤 마음이 작용했는지 이제야  보였다. 사실 내가 이걸 그만둬도 되겠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계속하는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엄마의 말을 듣고 어 하는 지난 일기 속의 내가.


직전 직장을 그만  당시 쌓였던 괴로움을 터뜨리며 엄마한테 “이렇게 까지 일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어.”라고 엉엉 울며 얘기하던 때가 생각났다.

온갖 거지 같은   겪으며  달만에 이미 ‘여긴 아니다싶었지만 엄마가 걱정할까  선뜻 때려치우지도 못하고 하소연이나  조차  마디 못하고 괜찮은  꾸역꾸역 다니던 나였다.  이상 그럴 수도 없어서 퇴사를 결심했고, 그간의 일이라곤 전혀 모를 엄마가 결과만 듣고 ‘그래도 대책 없이 직장을 관두면 어떡하냐라고 했을  내가 보인 반응은 엄마에게 적잖이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기 싫은  억지로 하는 법이 없고, 그런  있어서는 누구보다 판단과 행동이 빠른 내가  년이나 묵묵히 견딘 것이 엄마를 생각해서였다는 , 비록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우리 엄마니까  순간에 알아챘을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과 삶의 루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 너는  생각한 대로 착착 하니까  하고 싶은 대로 .”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싫은, 그러나 해야 하는 일의 무게에 눌려 마음과 몸을 축내가며 밤낮으로 일해야 하는 요즘의 나를 엄마가 봤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아마 그때의 반응과 다를  없을 것이다. 안정을 가장 원하는 엄마의 맘도 사실은 그게 나의 행복이라 믿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이라는 ,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든 하고 마니까 결국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삶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엄마에게 어떻게든 설명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는 지금 내가 모르는  마음까지 꿰뚫어 보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말로 설명을  기회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

2019 10 7


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 갈 때도, 취업을 준비하고 첫 직장에 들어갈 때도, 첫 퇴사를 할 때와 또 다른 직장에 들어갈 때도, 나는 진로와 일에 대해 가족과 시시콜콜 상의를 하는 일이 없었다. 거의 언제나 결정된 사안에 대한 통보만 해왔기 때문에 그 과정 속의 소소한 어려움을 알 리 없는 엄마는 나를 '생각한 대로 착착 해내는' 아이로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사회적 기업을 첫 직장으로 선택한 내가 자랑스럽게 내어 보인 급여통장에는 내 한 학기 대학원 등록금의 삼분의 일도 안 되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반응이 시원찮은 엄마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급기야 "엄마는 내가 여기 다니는 게 싫어?"라고 물었고 "솔직히 좀 쪽팔리지"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내 선택에 대해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곧 전적으로 믿어준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나라면 그 말이 단지 급여의 액수에 대한 말이 아닌, 나에 대한 엄마의 기대와 소망, 그리고 염려가 녹아있는 말이라는 걸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내공이 없었던 십여 년 전의 나는 '믿었던 우리 엄마가 속물이었다니'라는 생각에 부들부들하며 일기를 썼다. 그리고는 다시는 엄마한테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어차피 엄마한테는 쪽팔린 딸이 될 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충격과 분노의 기저에는 당연히 '내가 하는 일을 엄마가 인정해 주었으면' 하는 욕구가 있었다.


“솔직히 쪽팔린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스스로 이만큼이나 만족하는 삶이 부끄러워질 수 있는 건지, 왜 비전과 가치를 좇는 걸음을 일차원적인 잣대로 재어 멈추려고 하는지...... 애초에 자신도 아닌 다른 사람 인생으로 인해 쪽팔리거나 자랑스럽거나 한다는 것 자체가 가당키나 한 일인지, 사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척하는 순간 이제까지 한 점의 후회나 부끄러움 없던 내 삶에 미안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기로 한 나는, '솔직히 쪽팔린다'는 그 말이 나에게 그 어떤 부정적인 영향력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엄청난 애를 썼다.

2012년 1월 12일


 번째 직장에서 탈곡기에 영혼이 탈탈 털리는   빠지는 경험을 하고    만에  대책 없이 퇴사를 했다. 투병   차이던 엄마가 걱정으로 병세가 깊어지면 어쩌나 싶었지만 오히려  퇴사로 인해 엄마랑 둘이서 괌을 여행할 여유가 생겼고, 며칠간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었다. 정말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너무 좋아서 당분간 쉬면서 이렇게 같이 지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정도였다. 넌지시 말해보았지만 엄마는 절대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면서, 하고 싶은 일,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하면서  부러지게 앞가림하는 내가 얼마나 엄마의 마음을 든든하고 기쁘게 하는지 말해주었다.  일에 대한 인정과 응원을 엄마의 말로 듣는  처음이었다. '업데이트를   주면  좋아.  그런   번도   해주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야.' 볼멘소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저녁 식사 장소의 핑크색 석양이 꿈인  아름다워 속으로만 삼켰다. 모든  완벽한 행복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누가 꾸민 일인 것처럼 같은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떠나오기 직전에 면접 봤던 지금의 직장으로부터  합격통보였다.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닌데 퇴사일 바로 다음날  일터로 출근하는  자연스러운 이직 수순이 누군가의 계획과 도움이 아니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에너지와 보람이 넘쳤던 것은 대비 효과도 물론 있었겠지만 기쁘게 일하는 나를 우리 엄마가 기뻐한다는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분명하신 계획과 뜻에 따라 여기에 왔다는 확신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딸이 정확히 무얼 위해서 땡볕에 땀 흘리고 있는지, 자세히 들어 볼 느긋함과 인내심도 없지만, 그래도 우리 엄마 아빠는 어딘가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니 기특하다고 했다. 뭐가 됐든지 뭔가 확신을 가지고 즐겁게 하면 됐다고 하셨다.

판검사나 의사가 되어 자랑스럽게 해 드리는 것도 글러먹었고, 어머어마한 재력가가 되어 호강시켜 드릴 리도 만무하지만, 언젠가 아빠가 했었던 그 말을 믿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즐겁게 해 가려고 한다. 오늘도 나는 세계평화와 가정의 행복을 위해 일했다! 만세! 수고하셨습니당!  

2015년 5월 4일


그렇게 같은 팀 같은 보직으로 2개월 모자라는 6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엄마를 떠나보냈고, 삶은 완전히 변했지만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같은 일을 하는 건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일터가 위치한 지역이 우리 가족의 역사에 의미 있는 곳이라는 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좀 웃기는 이유지만 정말로 그랬다. 내 일터가 여의도라는 사실에, 우리 기관 건물이 언니가 태어나던 해 지어졌다는 말에 엄마가 반가워했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슬쩍 웃음이 나기도 한다.


엄마 아빠가 결혼식을 하고, 언니랑 내가 태어나서 꼬마로 자라기까지의 이야기가 넘치게 담겨있는 건물. 옛 G교회가 있던 이 빌딩이 마침 여의동 주민센터 가는 길목에 있는 것도 참 우연 같은 일이고, 내가 여의도에서 일하고 있는 것도 참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엄마 이름으로 된 주민등록 서류들을 받아 들고, 엄마 아빠 결혼식 피로연을 했다던 서글렁탕 집을 한 바퀴 돌아 걸었다. 서글픈 이름이네. 서글렁탕 집이라니.  

2016년 3월 16일


N년차 슬럼프 같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과 생각들이 결국 팀을 떠나는 결정을 하게 만들었고 이번에도 나는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하고 결정한 대로 실행에 옮겼다.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 하긴 했지만 조언을 구하기 위한 건 아니었고, 길어지는 과정에서 마음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누군가에게 위로를 구하진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랜 습관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정에서만큼은 엄마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일하는 나를 자랑스럽고 든든해한다는 엄마의 마음을 확인한 뒤로는 한 번도 엄마에게 의견 구할 일이 없었기에 이번에야말로 통보가 아닌 상의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일인걸 알지만 정말로 그러고 싶어서 모든 결정에 이전보다 주저했고 더 많은 것을 염두에 두었다. 결국 이번에도 혼자만의 몫일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에 나는 이전에 없었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선택이라면 무엇이든 엄마를 만족시킬 거라는 확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결정에 필요한 질문은 단 하나, '이 선택이 나의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주는가'이다. 우리 엄마가 나와 다르게 생각했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십 년 전의 나는 그걸 의심할 수 있었을까.


서른 살을 목전에 둔 12월에 홀로 떠난 여행에서 삼십 대의 장래희망을 '어디에 있든 무엇을 가졌든 다 버리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라고 풍등에 써서 날렸는데, 돌아보면 그 소원이 이뤄졌나 싶을 정도로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미련 없이 잘 떠나왔다. 후회는 원래 잘 없는 편이고, 환경의 변화로 에너지를 받는 ENTP니까, 새로운 부서에서의 반년도 재미나게 보낼 수 있어 감사했다. 앞으로 또 언제 어떤 결정의 순간들이 다가올까. 변함없이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하겠지만 혼자만의 생각일지라도 최소 엄마의 지지를 받고 있다. 엄마가 나타나서 번복할 때 까지는 그렇게 믿고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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