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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Oct 05. 2020

엄마가 가고 싶은 유럽은 어떤 곳이었을까

엄마는 쾌활하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할망구'라 고백했을 것이다

이번 주 '카일라스 가는 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감독이 팔십 노모와 함께 중국과 몽골, 중앙아시아를 거쳐 육로로 티베트의 성스러운 산 카일라스까지 가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서른일곱 살에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자녀들을 키우며 살아왔다는 한 줄의 설명은 주인공의 삶이 얼마나 긴 고생과 서러움의 시간이었을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실제 영화 속에 펼쳐지는 한 시간반의 스토리는 한 여인의 한 많은 세월과 이를 승화시키기 위한 고행과 도전의 드라마 같은 뻔한 내용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보다는 주인공 이춘숙 여사님에게 가득한 사랑과 긍정과 희망이 스크린 너머로 전해 질뿐이었다.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의도했다기보다 그저 감독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래 걷고 싶어서 엄마와 함께 길을 떠난 이야기였다. 선택받은 사람만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게 분명하다며 감사와 감격을 표현하고, 해발 오천미터 고원에서 '내 생일을 내가 축하합니다'라고 소리치는 귀여운 어머니의 이야기는 구구절절 감동적인 사연을 갖다 붙여 내러티브를 만들지 않아도 보이는 그대로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한가운데 있는 이춘숙 여사님이, 나이나 건강상태가 허락한다 해도 웬만큼 여행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엄두도 못 낼 2만 킬로미터의 육로 여행을 완주 해 내는 것을 보면서, 어디 바람 쐬러 가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던 우리 엄마 이필숙 여사가 생각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우리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가끔 엄마에게 들었던 이필숙 학생, 이필숙 아가씨의 이야기 속에는 자전거로 서울을 횡단하고, 외할아버지에게 용돈을 타서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는 쾌활하고 외향적인 엄마의 모습이 가득했다. 하지만 우리 엄마인 이필숙 씨는 뭔가 하고 싶다고 해도 혼자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음 맞춰 여행 갈 수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매들이 가까이에 사는 것도 아니었기에, 엄마의 그런 성향은 아주 가끔씩 아주 간접적으로만 표현되곤 했다. 아빠는 엄마가 말띠라서 밖에 나다니는 걸 좋아한다며 농담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을 심심찮게 하곤 했지만 어쨌거나 그 성향은 나에게 그대로 유전된 것이 분명했다. 가족 중 그 누구보다 엄마의 그런 욕구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반응하는 사람은 나였고, 그래서 엄마도 어디 가고 싶을 때마다 나부터 살살 찔러보는, 우리는 놀러 다니는 데 있어서는 꽤 잘 어울리는 짝꿍이었다. 



다른 엄마는 언제까지 빈둥거릴 거냐면서 바가지를 긁는다는데 우리 엄마는 10월이 어떤 달인지도 모르고 우리도 좀 놀러 가자면서 바가지를 긁어댄다. 아, 엄마는 철이 없네. 없어도 너무 없네 ♬  

2011년 10월 5일



엄마가 원했던 건 호사스러운 효도관광도 아니었다. 사실 그런 건 보내드려 본 적도 없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은 이십 대 수준의 행군을 나랑 함께 하고서도 “너랑 가면 뭐든지 재밌어. 너하고 가는 거는 어디든지  좋았어”라고 말할 만큼 빡센 체험형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부모님과 가는 여행에서 흔하게 고민하듯 메뉴 선정에 머리가 아플 일도 없었다. 나랑 함께 한 여행 중 최고로 꼽았던 일본 홋카이도 여행에서 뭐가  맛있었는지 물으면 큰돈 썼던 대게요리가 아니라 기차간에서 먹은 에끼벤을 꼽을 만큼 엄마는 고집하는 음식도 가리는 메뉴도 없었고, 그저  새롭고 신나는 것을 원하는 즐거운 사람이자 가슴에 모험가를 품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원하는 여행이란 거의 시간이나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건 결국 같이 떠나는 나의 상황을 말한다. 혼자서 또는 친구랑 같이 떠나는 여행을 앞세워 엄마랑은 다음으로 미루다 보니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 가고, 내가 세계 곳곳 원하는 곳마다 깃발 꽂듯 여행과 출장을 다니는 사이 엄마는 어느새 장거리 여행을 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직후, 다른 여러 가지 생각 중에도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엄마랑 어디든 빨리 많이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십 년 묵힌 내 장롱면허가 그때만큼 후회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엄마랑 경주여행. 호텔 클래스에 경악했지만 맘 편히 걷고 요양하는 평화로운 경주 데이트가 너무 좋았다. 기차 타고 설레 하는 엄마를 보는 것도 좋았지만, 약기운인지 피곤해하는 엄마를 보며 부지런히 여행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병 때문이 아니더라도 점점 쇠약해질 것이고, 후회 없는 시간을 엄마와 보내고 싶다.

2014년 10월 11일 



투병 이년 중 상태가 꽤 좋았던 초반에 친정 가족들이 있는 캐나다에 갔다 오겠다는 계획을 의사는 만류했다. 나는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한평생 떨어져 살던 가족들을 잠깐 보고 다시 돌아오는 게 서로 눈물바다 되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가 있나도 싶었다. 대신 그 정도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꼭 한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면 그 행선지는 유럽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프기 전부터 엄마는 꽤 자주 "나도 유럽 한번 가보고 싶다"라고 말하곤 했다. 동서남북 유럽으로 나뉘는 수십 개의 나라가 뭉쳐진 지역이 유럽 이건만, 정확하게 어떤 유럽이냐고 물으면 "몰라, 그냥 유럽"하고 소녀같이 대답하고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수년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진지하게 물어보거나, 구체화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던 나는 뒤늦게서야 휴가 일정과 가고 싶은 행선지 후보에 대해 엄마랑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지만 결국 그 계획은 실행할 수 없었다. 투병 일 년쯤 되었을 때 치료법을 바꾸기 위해 준비하는 며칠 동안 괌에 다녀온 적이 있지만 여행지에서는 언제나 나보다 더 신나 하면서 사진 좀 찍어보라며 익살을 부리던 엄마는 이미 너무나 약해져 있었다. 그 따뜻한 나라에서도 계속해서 기침을 하고, 늘 신던 신발의 지압 침이 아파서 많이 걷지 못하겠다는 엄마를 보면서 이게 함께 하는 마지막 장거리 여행이 될 거라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사실이 되었다. 엄마랑 유럽에 가야겠다는 계획은 영원히 이루지 못할 꿈으로만 남았다.




어쩌다 보니 언젠가부터 해마다 가고 있는 유럽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때면 종종 ‘엄마가 가고 싶었던 유럽은 어떤 곳이었을까’ 하고 궁금해진다. 부다페스트의 야경도, 이태리 로마의 유적들도, 런던과 파리의 숱한 미술관들도, 엄마는 분명 '~랑 똑같네' 하면서 김새게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려할지언정, 엄마한테 이 모든 걸 보여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때때마다 너무 크게 밀려오곤 한다. '엄마는 다 똑같이 생각하니까 좋은 거 해 줘 봤자 아무 필요가 없어'라고 언니랑 농담으로 고개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아무 쓸 데 없고 지나면 보람 없어질 '엄마에게 넓은 세상 구경시켜주고 그 즐거움을 함께하는 일'이, 내 한 몸 여행 다니고 노는 일 보다 더 간절해지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2016년 12월



엄마를 보낸 그 해에도 나는 유럽에 갔다. 다음 해도 그다음 해에도 나는 출장과 여행으로 유럽 땅을 밟았고, 작년에는 엄마 큰딸이 미주에서 유럽으로 주거지를 옮기기까지 했다. 대륙을 옮겨 이사한 언니네 집에 이민가방 두 개 가득 한국 물품을 채워 가져 가면서, 엄마의 첫 유럽행이 이사한 딸네 집에 가는 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엄마가 가고 싶었던 유럽이란 어떤 모습이었을지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겠지만, 그게 어디든 무엇이든 간에 엄마는 아이처럼 감탄하고 소녀처럼 설레 했을 것이고 그런 순간을 당신의 딸들과 손녀가 함께한다는 건 엄마가 생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행복이었을 게 분명하다. 굳이 해발고도 오천미터까지 오르지 않고도 엄마는 쾌활하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할망구'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어쩌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들썩들썩하기까지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모님 생전에 못다 한 효를 생각하며 눈물로 지새운다 뭐 이런 진부한 끝맺음을 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 못한 건 하나하나 꼽지 못할 정도로 많으니까. 다만 엄마를 유럽에 못 보내드려서라기 보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할망구가 될 자격과 가능성이 충분한데도 그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게 보다 근본적인 아쉬움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가고 싶은 유럽은 어떤 곳이었을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두 가지 이유다. 어디였다 해도 엄마는 행복해했을 것이기 때문이고, 이제 유럽 어느 구석으로 가든지 엄마 생각을 지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전 01화 엄마의 여권이 수명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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