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버려졌지만 결코 버려질 수 없어 마음에 옮겨둔 것들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우리 집에 와서 가족의 역사를 오롯이 함께 살아낸 2000년형 그랜저를 지난해 여름 보내주었다. 먼 길 오갈 때 주행 중에 핸들이 뻑뻑해지는 등 위험 신호가 있었다는 말을 아빠에게 들은 지는 이미 꽤 됐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고쳐 쓰지 하고 인공호흡 하듯 마지막까지 정비소를 들락날락했던 건 약 25만 km의 주행거리 속에 우리 가족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었을 텐데, 사십 년 넘게 무사고 운전인 아빠가 안팎으로 애지중지 관리했는데도 세월을 이기는 건 역부족이었나 보다.
그날은 평일 낮이었는데 이례적으로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마침 이직 과정이라 출근할 곳이 없긴 해도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바빴는데, 오늘 차를 폐차한다는 말에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타봐야지"라는 말이 다급히 내 입에서 먼저 튀어나왔고 아빠도 "그래 그럼 폐차는 내일로 미루고, 지금 집 앞으로 갈게"라고 답했다.
매년 여름에는 성경학교, 각 기관별 수련회 등 교회 행사가 꽉 차 있는 덕분에, 우리 가족의 여름 휴가지도 언제나 전 교인 수련회를 가는 속초였다. 지금처럼 양양 고속도로가 뚫려 있을 때가 아니라서 꼬불꼬불 고개를 넘어 태백산맥을 지나려면 네 시간은 훌쩍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교회 승합차로 다들 시끌벅적하게 강원도에 도착하고 나면, 언제나 극심한 멀미에 정신을 못 차렸던 어린 나는 아빠 차 뒷자리에 옮겨 타고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서 이동하곤 했다. 강원도, 특히 속초라는 지역은 참 오랫동안 '멀고 먼 곳' '멀미'라는 키워드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작년에 혼자서 한달살이를 해보기 전까지는. '속초 OOO 비치'라는 이름이 붙어 있던 그 수련회 장소가 사실은 고성군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작년이 되어서야 알았을 때는 인생의 절반 정도를 속은 느낌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시험기간만 되면 꼭 아빠는 걸어서도 20분밖에 안 걸리는 학교 정문까지 언니와 나를 차 뒷좌석에 태워 데려다주었다. 교문 앞에 도착해서는 꼭 머리에 손을 얹거나 손을 잡은 채, '암기력과 집중력과 구상력'을 위해 기도한 뒤 내려주었고, 그게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심지어 대학원 때까지 변함없는 시험기간의 루틴이었다. 아빠가 해 주는 기도의 어떤 신령한 힘이 내 시험공부를 완성시켜 준다는 등의 의미는 없었다. 반짝 시험공부로 피로한 몸이 잠시나마 편해지는 이유도 있었지만, 왜인지 모든 게 불만이었던 십 대 언저리일 때에도 '빨리 내려와라'라고 서두르는 아빠에게 짜증은 냈을지언정 그 차를 타고 등교하는 사실 자체에는 아무 의문이 없었던 게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우리 가족이 가끔 외식을 하는 장소는 잠실 롯데였다. 아빠가 엄마한테 "아-들(=아이들. Son 아님) 데리고 와라"라고 전화를 하면 엄마랑 언니랑 나는 순환노선인 지하철 2호선을 한 1/3 바퀴쯤 돌아서 잠실역까지 갔다. 아직도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는 롯데백화점 짝퉁 트레비 분수 앞을 지나 오후에 백화점에서 시간 보내다가, 저녁 먹고 나서는 다 같이 아빠 차 타고 집에 돌아오는 특별할 거 없는 일정이었는데, 어릴 때는 먹는 양을 잘 조절 못했는지 집에 올 때는 너무 배가 부르거나 멀미가 난다는 이유로 거의 항상 차 뒷자리에서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서 왔다. 네 가족이 같이 차를 탈 때는 항상 조수석이 언니 차지였는데, 엄마보다 언니가 지도를 더 잘 봤기 때문이었지만, 이유가 어쨌거나 나는 나만 엄마 다리를 베고 누울 수 있어 좋았다. 우리 엄마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다정한 말을 평소에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눕기만 하면 이마를 짚어주기도 하고 몸을 토닥여주기도 했다. 끌어안은 엄마 가방을 뒤적뒤적하다가 걸리기 전까지만.
여의도는 아빠의 청년시절 일터이자, 그 시절 아빠의 열정과 애정이 가득한 지역이었다. 곳곳에 이야기가 녹아있고, 심지어 엄마아빠가 결혼을 했던 장소 건물도, 아빠가 상호를 지어줬다는 설렁탕집도 그대로 있는 그 여의도에서 나도 꽤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했다. 종종 시내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는 나를 차에 태워 여의도까지 바래다주곤 했다. 일정은 오후에나 있으면서 나랑 사오십분 쯤 차를 타려고 굳이 아침 출근시간에 나서는 아빠를 알기에, 나도 굳이 '출근시간에는 지하철 타고 가는 게 예외 없이 항상 더 빠르다'는 말을 주장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그렇게 다정한 시간만은 아니어서 절반을 채 못 가서 언성 높이고 짜증 내는 경우도 참 많았는데, 차가운 침묵이 흐를 때 아빠는 언제나 "내 죽으면 이 자식이 이 차에 타고 다녔던 거 생각하며 얼마나 많이 울꼬"라고 다 들리는 독백을 하곤 했고, 대부분의 경우 그 말은 내 화를 더 돋웠다.
엄마가 아팠던 약 2년 간 아빠는 내내 엄마를 조수석에 태워 병원을 오갔다. 언니나 내가 탈 때는 조수석이 비어있더라도 넓게 앉아서 가라며 차 뒷좌석으로 보내곤 했는데, 엄마랑 둘이 차를 탈 때는 지도도 잘 못 보는 엄마를 옆에 태웠다. 엄마가 아빠 차를 건강히 탈 수 있을 때까지는. 차에 나란히 앉아 서울대 병원을 숱하게 오갔을 동안 아빠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긴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며 엄마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겠지만,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하지?"라는 아빠 질문에 "하지"라는 엄마의 대답이 오고 간 것도 이 차의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니, 삼십 년이 넘도록 같이 산 부부가 그 자리에서 주고받았을 마음과 감정도 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또 깊었을 것이다. 알 수 없어서 상상할 수밖에 없는, 이제는 알 길은 없고 상상만 할 따름이라 더 슬퍼지는 그런 엄마와 아빠의 시간들.
엄마를 홍천에 묻고 돌아와서 며칠쯤 지나 아빠 차를 타고 다시 한번 묘소에 찾아갔던 게 아직까지 내가 그 장소에 갔던 마지막 날이다. 언니랑 조카는 같이 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막내 이모와 사촌오빠, 그리고 아빠랑 함께 차에 탔던 기억은 난다. 아직 찬기운이 가시지 않은 초봄에, 잔디가 채 자라나지 않은 황토색 봉분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렸다. 왜 언 땅 밑에 사람을 두느냐고 속으로 생각하느라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 나누었던 말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다짐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았다. 나는 다시는 엄마의 묘소에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마지막 드라이브 코스를 어디로 해야 할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태운 아빠는 이미 그 방향으로 결정했다는 듯 차를 움직이며 "롯데 잠실 갈까?"라고 말했다. 동네 한 바퀴는 너무 짧고, 이 차를 타고 다녔던 학교와 직장을 다 돌기에는 너무 많으니까, 그렇다고 엄마 산소에는 절대 가고싶지 않으니까, 한 코스를 정한다고 하면 네 가족이 가장 많이 다녔던 잠실 롯데일 수밖에. 우리 가족 모두 근심 없이 집에서 송파구까지 오고 갔던 것은 이제 기억도 안나는 옛날일이 되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많은 세월 속에 가장 평범한 우리 가족 일상의 한 장면이 거기 있기에, 23년의 세월을 다 끌어안고 있는 이 차의 마지막 주행도 우리 가족의 것이길 원했다. 운전만 하면 말이 길어지는 아빠도, 아빠 차만 타면 잔소리가 많아지는 나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가능한 오래 걸렸으면 하고 바랐던 그 날의 그 마지막 드라이브는, 아마도 내가 사는 동안 영원히 기억할 또 하나의 장면일 것이다. 그날을 보내고 다음날에도, 그 이후에도 아빠는 폐차를 했다는 말을 내게 전하지 않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차는 버려졌지만 결코 버려질 수 없어 마음에 옮겨둔 것들, 일 년도 더 지난 글을 쓰는 지금 다시 한번 꺼내어 보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