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진을 남겨 보관한다는 것 자체가 보잘것없는 존재의 안간힘
혼을 쏙 뺄 정도로 장엄한 두 개의 폭포를 지나 오늘 하룻밤을 보낼 비크 이 뮈르달 지역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열 한시가 넘어서야 해가 떴지만 오후 네 시면 완전히 사라져 어두워질 것을 생각하니, 검은 모래해변 레이니스파라에서 보낼 수 있는 낮 시간이 한 시간도 채 안 남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분명히 스코가포스에서 30km 정도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는데, 가도 가도 같은 풍경만 계속 보기를 30분째, 2분 후 도착이라는 내비게이션 안내를 보고도 대체 이 거대한 설산 골짜기 한가운데 어떻게 해변이 나타난다는 건지 모두 미심쩍어했는데, 큰 산 하나를 끼고돌자 거짓말처럼 레이니스파라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1번 국도를 벗어나 해변 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이었는지 수평선은 바로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지평선과 주차장, 그리고 컨테이너처럼 생긴 카페테리아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에서 내려 몇 걸음 앞으로 떼자 회색 하늘 아래 말할 수 없이 스산한 검은 모래해변의 풍경이 압도적으로 밀려왔다. 흐린 날씨, 저무는 해, 그리고 까만 땅 위에 흰 눈. 흑백 필터를 씌운 듯한 무채색의 풍경은 고요한데, 적막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들이치는 한겨울의 거센 파도 소리가 홀로 포효하는 이 풍경이 압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도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풍경에 에워싸이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찔끔하고 났다. 여행 전, 우리 중 누군가 레이니스파라가 가장 기대된다고 했을 때 ‘그냥 해변 아닌가?’ 하며 대수롭잖게 지나쳤던 나였는데.
하지만 아무런 기대가 없던 레이니스파라와의 조우는 ‘아름답다’, ‘멋지다’ 정도의 언어로는 다 묘사할 수 없는 벅찬 느낌이었다. 바다가 주인공인 공간에서 그 주변 풍경 모두를 아울러 ‘바닷가풍경’이라고 말하는 게 보통이지만 왠지 여기에서만큼은 바다가 이 풍경을 구성하는 작은 일부 같은 느낌이랄까, 많은 바다를 보았지만 이렇게 묘한 바다를 마주한 적은 없어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을 그저 바다라고 해도 될까 싶었다. 이토록 특별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아무래도 ‘검은 모래해변’ 때문일 텐데, 제주의 ‘삼양 검은 모래해변’ 정도로 어두운 색의 모래가 아니라 현무암 색깔과 같은 검은색 흑연처럼 까만 모래고, 바다에 가까운 곳에는 동전 크기부터 주먹 절반크기까지 다양한 크기의 동글동글한 자갈들이 섞여있다. 그 까만 땅이 쌓인 흰 눈과 완벽한 대비를 이루고, 뒤편으로는 흐린 하늘이 어둑해져 가는 풍경과 함께 한 편의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영화 같은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좌측에 서 있는 해식 기둥 레이니스드랑가르 Reynisdrangar에는 트롤의 전설이 전해온다. 바다를 항해하다가 아이슬란드에 다다라 배를 뭍으로 끌어오던 트롤들이 수평선 저 멀리 동이 터오는 바람에 해를 보자 돌기둥으로 변해버렸다는 건데, 트롤들이 해를 보면 안 되는 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처음 알았다. 그래서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트롤이 전투하는 씬만 나오면 그렇게 화면이 시커메졌었구나. 그냥 돌기둥 하나에 얽힌 이야기에도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여행을 갈 때는 꼭 옛날이야기를 찾아보는 편인데, 아이슬란드는 유독 곳곳마다 이야기가 있는 느낌이다. 날이 너무 혹독하다 보니 따뜻한 방구석에서 이야기를 지어내고 들려주고 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이들 민족이 생각하는 트롤의 형상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촛대바위나 선녀바위, 혹은 망부석이나 효녀 설화 이 중 하나는 꼭 있을게 분명한 생김새다.
검은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커다란 주상절리로 만들어진 해식동굴 할사네프셸리르 Hálsanefshellir 동굴이 바다를 마주 보며 자리 잡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수축되고 떨어져 나가 지금의 독특한 모습을 형성했다고 하는데, 벌집 같기도 하고, 블록 같기도 하고, 일부러 이렇게 만들려고 해도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뛰어난 자연의 조형미다. 단연 압도적인 곳이라 동굴 안에 머물며 한참을 신기하게 만져보고 목이 꺾여라 둘러보며 오래 시간을 보냈는데, 사실 이곳은 파도가 조금만 세면 위험해서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라 한다. 레이니스파라 초입에 그날의 통제 상황을 나타내는 안내판과 신호등이 있다고 하던데 여기 들어갈 때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직진하느라 있는 줄도 몰랐다. 사실 그 입구에 주차등록기도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못 봐서 주차비가 공짜인 줄 알았던 우리… 무식이 용감하다고 알고 보면 경범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위험에 처할 뻔했지만 여러모로 운이 따라주었던 것이었다.
제주도에서도 볼 수 있는 주상절리이지만 내가 살면서 봤던 많은 주상절리는 절벽을 멀리서 내려다보거나 배를 타고 올려다보거나 했던 거 같은데, 이곳에서는 동굴을 포함해 걸으며 손을 뻗어 만져볼 수 있는 돌들이 모두 주상절리의 일부이다. 그 때문인지 돌기둥 하나하나의 사이즈가 엄청 크게 느껴지는데, 일부 몰상식한 관광객들은 분명히 올라가지 말라고 쓰여 있는 그 돌기둥을 타고 올라가 그 위에 서서 독사진 혹은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다.
무섭게 들이닥치는 북대서양 파도 앞에서 약 올리듯 아슬아슬하게 뛰어다니며 사진 찍다가 갑자기 멀리까지 넘어온 파도에 쓸려 넘어진 사람도 있었다. 매년 파도 때문에 사고가 있어서 절대 바다를 등지고 서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고, 2주 전에도 눈 깜짝할 새에 파도에 쓸려간 관광객의 사망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무서운 줄 모르고 추억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깔깔 웃어댔다.
나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포토제닉인데 저런 눈살 찌푸려지는 광경을 볼 때마다 과연 사진이란 무엇을 위한 것이며 무엇이 멋진 포즈이고 애초에 왜 포징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가장 멋진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되는데 굳이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이유는 내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를 내 기억보다 더 길게 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생생한 감상과 감동이 없어지고 난 뒤에 객기 어린 포징을 하고 있는 내 철없는 모습을 사진으로 다시 본다면 웃음이 지어지기보다는 낯 뜨거울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이 어떤 이유로든 빠르게 사라져 가는 이런 시대에는 특별히 더 ‘지금이 이곳에 있는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다’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렇게 보면 이 단단한 돌들이 결대로 깎이고 떨어져 나간 모양은 바람과 시간이 수천수만 년을 지나가고 흔들며 남긴 지문일 텐데, 점찍듯이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 내 존재가 여기에 무슨 흔적을 남기고, 정복하기라도 한 양 내 사진을 남겨 보관한다는 것 자체가 보잘것없는 존재의 안간힘 같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자연의 꾸준한 흔적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겸손해졌다 싶으면 또 신나게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나는 역시나 자연에게서 깨달음을 얻어 득도하기에는 모자란 인간. 그래도 저렇게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오래오래 살아서 여기저기 좋은 데 다 구경하고 싶으니까.
바다를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코끼리 바위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디르홀레이가 보이는데, 코끼리바위는 울릉도에도 있고, 오키나와 만자모도 있고, 여기저기에 있으니까 딱히 관심이 가진 않는다. 그저 여기에 서서 흑백영화를 끝없이 감상하고 싶었지만 이제 시간은 4시를 넘어 어두운 밤이 되어 가고 있으므로 더 늦지 않게 숙소로 이동해야 했다. 지도로 보면 걸어서도 갈 것 같은데 또다시 1번 국도 타고 차로 14분이나 달려 아이슬란드 최남단 마을이라는 비크 이 뮈르달, 줄여서 비크라고 부르는 동네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