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어예 Feb 25. 2024

제5화 양자역학을 아십니까?

슈뢰딩거의 대장

슈뢰딩거의 고양이

양자역학의 특징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시로 흔히 사용된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미시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 사건이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률적으로밖에 계산할 수가 없으며 가능한 서로 다른 상태가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위키백과



원인은 마음이다!

나에겐 어릴 때부터 너무 생각이 많은 아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하지만 나쁜 꼬리표는 아니었다. 공부하는 데는 생각이라는 것이 필요하니까. 열심히 추론해서 수학 문제를 풀고, 열심히 인과 관계를 고민하여 역사, 사회 등의 과목을 외워 좋은 성적을 받았으니 생각이 많은 똑똑한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많은 생각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부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환경에 놓여지면 무럭무럭 생각이 자라났다. 문제는 그 생각의 끝이 늘 비극이라는 것이었다. 만약으로 시작된 생각은 꼭 화장실을 갔다 와야 끝이 났다. 자동차는 아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의 대표적 케이스가 되어버렸다.

참다 참다 증세가 너무 잦을 때 병원에 가면 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할 뿐이다. 할머니도, 엄마도, 답답한 일이 생기면 관자놀이에 무언가를 묶고 드러누웠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그저 화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동양적 사고를 알게 모르게 접하며 자라온 우리들에게는 마음의 힘이라는 것이 새삼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기원전부터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一切唯心造)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힘이 있다는 것은 알 듯 말 듯 무언가 애매모호한 철학적인 문제이고, 병이란 것에는 좀 과학적인 해결책이 좀 나와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답답함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과학자들이 마음의 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명쾌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결정하는 변수를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했고 보어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우주에 대해 우리가 기술할 언어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이게 다 양자역학 때문이다. 모든 것이 확률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가 관찰자가 측정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결정되는. 그 결정된 것마저도 우리가 관찰하는 행위로 시시각각 변하여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그 양자역학은 동양 철학과 유사하다. 다른 점이라면 온갖 이해 할 수 없는 숫자와 공식과 실험들로 과학이 철학적 내용을 증명해 냈다는 것이다. 명쾌하지 않은 언어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갖게 되었다.


마음에 양자역학의 법칙을 적용하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이 불러온 과민성대장증후군도 아주 과학적으로 해결이 될 터이다. 나도 결국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내 배도 원자의 집합일 뿐이니 나의 배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1)를 적용해 보아야겠다. 나의 배를 관측하기로 한다. 나의 의도는 내가 배의 관찰자가 되어 배의 상태를 변화시켜 보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행위가 값에 변화를 일으킬 터이니 내 배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외출하는 길,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여러 가지 가능성의 파동 상태로 존재하던 나의 배 안의 원자들은 아픈 상태로 확정되어 요동치기 시작한다. 내 배의 입장에서는 자동차가 아주 부정적인 관찰자이겠지. 숨을 크게 들이 쉬고 눈을 감고 배를 바라본다. 숨을 내쉬며 또 배를 바라본다. 배에 의도를 두고 생각의 흐름대로 따라가던 중 나의 관측이 효과가 있는지 배의 요동이 가라앉는 듯 하다. 불현 듯 다른 생각이 든다. 나의 관측이 왜 긍정적인 반응을 가져 올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관측이 객체에 영향을 준다고 했지 그것이 긍정일지 부정일지는 확률 게임일 텐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배가 아프다.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져야 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신경을 꺼야 하나?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아가고 있을 때 남편이 나를 흔든다.

“휴게소 왔어. 갔다 와.”

“어딜?”

“화장실. 두 손 모으고 그러고 있는 거 배 아픈 거 아냐?”

“안 아파!”

“그래? 근데 준이 배 아프데. 데리고 화장실 같이 갔다 와.”

뒤를 돌아보니 큰 아들이 내가 배 아플 때 표정과 비슷한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 내가 이 세상에 유일한 관찰자가 아니었지. 차 안에는 내 배를 관찰하는 내가 있고, 내가 차만 타면 배가 아프다고 생각하는 가족들이 있고, 가족들은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고 있다. 이런 결어긋남2) 같으니! 나의 아픔이 양자얽힘으로 큰 아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아서 괜시리 미안해진다. ‘양자역학으로 세상사가 다 이해가 되는구나. 조금만 더 연구하면 나의 과민성대장증후군도 이제 완치될 수 있는 방법이 있겠구나. 양자역학이 절대 법칙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배가 또 사르르 아프다.


즉비(卽非) : ()하고 비()하자

즉비(卽非)다. 양자역학은 절대법칙이 아니다. 양자역학은 양자역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양자역학이라고 불린다.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또다시 주관적이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확률적 세상으로 내 던져졌다. 철학은 애매모호하고 과학은 믿을 만하다는 구분, 과학이 어떤 것에 해결책을 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하나의 법칙이 절대적이며 영원불변할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진다. 결국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과학이나 불교나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 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탐구해야 할 본질은 있지만 그 본질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많은 씨줄과 날줄에 의해서 그저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여지는 것조차 늘 변하는 것이므로 의심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본질에 대해 탐구하며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무시하지 않고 바로 지켜보고,(卽) 내가 바라보는 순간 나의 관찰이 개입되니 내가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比) 결국 보되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매몰되지 않고,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부정이다. 즉(卽하)고 비(比하)며, 기억하자. 이 이 양자역학의 불확실한 세계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변수를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할 것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의지로 과민성대장증후군을 낫게 하려는 그 마음조차 내려놓자. 어쩌면 애초에 나아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1)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

2) 결어긋남 : 양자계가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결과값이 변하는 현상

* ‘마음은 생각과 뜻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김수업 교수님의 글에 바탕을 두고 마음과 생각과 느낌이라는 단어를 혼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전 04화 제4화 화장실 어디까지 가봤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