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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전쟁은 끝날 수 없었다

프리모 레비, 『휴전』

by ENA

1944년 1월 아우슈비츠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소련군의 점령 이전에 독일군은 수용소에 갇혀 있는 이들을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성홍열, 디프테리아와 같은 질병에 걸려 이동이 힘들었던 7,000여명에 불과했다. 프리모 레비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수용소에 남았던 이들도 많이 죽었지만, 레비는 거기서도 용케 살아남았다. 그때까지의 이야기는 『이것이 인간인가』에 담았다. 『휴전』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아우슈비츠에서 해방 이후 고향 토리노까지 돌아오기까지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이 인간인가』의 속편인 셈이다.


“자유,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자유, 아우슈비츠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어서 꿈속에서만 감히 바라보아야만 했던 그 자유가 찾아왔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주위에, 무자비하고 황량한 벌판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시련, 또 다른 피로, 또 다른 배고픔, 또 다른 추위, 또 다른 두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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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과정이었다. 초기 몇 달 동안은 카토비체의 소련군 주둔지에서 생활하며 간호사로 일했고, 6월이 되어서야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못한다. 귀향은 무려 네다섯 달이나 걸렸다. 동쪽으로 이도앟여 즈메린카로, 다시 얼토당토 없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스타리예 도로기로, 거기서 몇 달을 보낸 후에야 남쪽으로 이동하고,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고향에 다다르게 된다. 프리모 레비는 이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 그리고 함께 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성과 인간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그렇다고 에피소드의 의미라든가 인물들의 옳고 그름에 대해 섣불리 평가하고 있지는 않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상시의 의미로 결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인간성에 해당할 수도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인물들을 선과 악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대신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건조한 언어 대신 유머 깃든 표현들로 독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다. 이는 그가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깊은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독일군과 소련군에 대한 묘사도 매우 날카로우면서도, 분노 같은 것을 내비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도 독일군이라든가, 독일인에 대해 그랬지만, 소련군에 대해서도 해방시킨 군대이기에 기뻐하고 환영한다거나, 얼토당토 않게 귀향을 미루었기에 분노한다거나 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화학자’인 그는 딱딱한 규율의 독일군의 차가운 세계와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소련군의 세계를 대비시키며 비교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물론 그가 여기서 명시적으로 평가하지 않더라도 독일의 만행을 달리 평가할 독자는 없다. 그는 이미 그걸 알고 있다).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 각각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결산을 해야 할, 체스 선수들이 경기가 끝날 때 그러는 것처럼 질문하고 설명하고 논평해야 할 절박함을 느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자기 집 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상적으로 자행된 조용한 대학살에 대해 ‘그들’은 알고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고 교회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수 있었던 말인가?... 나는 내 팔에 문신으로 새겨진 숫자가 쓰라린 상처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들었다.” (323쪽)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대충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왜 제목이 ‘휴전’이냐는 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라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야기임에도 그는 ‘휴전’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낸 것이다. 이 의문에 관한 힌트는, 책에서 현인으로 묘사되고 있는 그리스인 모르도 나훔과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다.


나훔은 신발이 망가져 거의 맨발로 다닐 수밖에 없게 된 레비를 보고 바보라고 질책한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데 신발과 먹을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둘 중에서도 신발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전쟁은 끝났다고 하는 레비에게 나훔은 “전쟁은 늘 있는 거야.”라는 ‘잊을 수 없는 대답’을 한다(79쪽).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은 이들에게 전쟁은 절대로 끝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되었고, 고난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유를 찾았다. 그 2년간의 기억은 너무나 또렷했고, 그래서 기록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고,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의 공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인식하기 위해서는. 늘 전쟁인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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