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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제이 Apr 28. 2019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갚아야 할 마음의 빚, 엄마


네 번째,

애잔한 날



난 두 명의 오빠와 함께 자라 몹시 천방지축이었고, 큰오빠를 전교 회장까지 시킨 엄마의 치맛바람이 효과가 없었는지 막내딸이었던 나의 어린 시절은 자유로웠다. 부모님이 나의 조기 교육을 포기하신 것인지 의도적으로 방임을 선택하신 것인지 난 그 이유를 알지 못다.


난 초등학교 시절 반에서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불렸고, 각종 사생 대회 참로 결석도 잦았고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구구단을 못 외운 날이면 남아서 담임 선생님 퇴근 시간까지 구름사다리에서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오히려 즐거웠다. 학년이 올라가도 교실 뒤편에 내 작품을 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오직 미술 시간만 유독 내 두 눈은 반짝였다. 친척집에 놀러 갈 때도 굳이 번거롭게 스케치북, 붓, 물감, 물통까지 챙겨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 그림 그리는 것이 참 좋았나 보다.


중학교에 입학해 '과학 그림 글짓기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되자 엄마가 나를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화가는 배고픈 직업이야.

이젠 네가 많이 컸으니, 나중에 뭘 하고 싶은지 한 번쯤 생각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린 나이에 엄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이해가 가질 않았으나 중학교는 초등학교와는 사뭇 달랐다.

그림 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던  나는 공부를 잘해야 선생님과 친구들이 좋아한다는 '인정 게임'을 알게 되었, 커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의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동안 밀린 공부를 따라잡느라 잠자는 시간 빼곤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등하교 시간까지도 책을 놓지 않았으니 가족들이 '갑자기 나타난 우리 집 독종'이라 부를 만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상위권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내게 약점이 있었다. 난 어릴 적부터 유독 겁이 많은 쫄보였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 혼자 있는 시간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귀신, 악당들이 갑자기 나타나 나를 괴롭힐 것 같은 생각들로 괴로워했다. 오빠들은 그런 내가 재밌었는지 매번 참신한 괴담들을 내게 들려주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내 반응에 신나 했다. 빠들의 서운 이야기에 내 쓸데없이 풍부한 상상력이 더해지면  혼자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 '수호천사' 자처하셨다. 하루 종일 고단 하셨을 텐데 졸린 내색 한번 없이 내가 공부를 마치고 잠이 들 때까지  곁을 조용히 지켜주셨다.


불현듯 알게 되는 때가 온다.


한석봉의 어머니가 왜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써라."라고 말했는지. 

왜 우리 집이 맹자의 어머니처럼 교육 환경이 좋은 동네로 여러 번 이사를 다녔는지, 가 그때 엄마의 나이만큼

크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게끔 내버려뒀던 그 시간은 내게 한 가지에 집중할  있는 '몰입'을 가르치기 위함이었고, 내게 단 한 번도 공부하라고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것은 내가 스스로 공부에 재미를 붙일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필요로 하는 그 순간에, 늘 내 곁을 지켜 주셨다. 




회사 미팅 중에 계속 핸드폰이 울렸다. 가족들은 내 업무에 방해가 될까 봐, 업무 시간엔 카지언정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날은 유독 오빠들로부터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었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난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위독하대. 빨리 내려와. 

지금 바로 응급 수술 들어가야 한대. 마음의 준비를 하래."


엄마가 내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엄마는 평소 두통을 앓고 있었고, 고혈압이 있으셨으나 갑자기 수술이 필요할 정도의 지병이 없으셨다. "도대체 갑자기 왜?"라고 난 오빠에게 소리쳤고, 오빠는 "대동맥 박리래, 연세 드신 분들은 혈관이 약해져서 갑자기 일어날 수 있대"라며 울음을 참아내며 간신히 대답했다. 오빠는 내가 서울에서 내려오는 4시간 안에 나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단 예감이 들었는지,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엄마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난 다급한 목소리로 "엄마, 버텨줘. 우린 엄마 없으면 못살아.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를 수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엄마는 모든 걸 체념한 듯한 나약한 목소리로 "가족끼리 서로 잘 위하면서 살아야 돼, 오빠들 잘 부탁해."라는 말을 남기기가 무섭게 핸드폰 너머로 "수술실로 이동할게요!"라는 의료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집으 내려가는 4시간 동안 차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난 아무런 기억이 없다. 대학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가족 친지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수술실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인사를 나누고 대기실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하염없이 기도를 했다. 그리고 내가 학생이어서 어리다는 핑계로, 미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한국에 돌아와서는 직장 다니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엄마는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커가는 사이, 엄마는 내게 '엄마'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내며 늙어 가고 계셨던 것이다.  


수술 실 문이 열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내 눈은 엄마를 찾고 있었다. 10시간가량 지났을 때 담당 의사 선생님은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수술이었다며 수술은 잘 끝났으나 오늘 밤이 고비라는 담담한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나셨다. 중환자 실은 면회시간이 정해 져 있었다. 난 짧은 면회시간 동안 엄마의 주름 진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엄마, 미안해. 내가 많이 사랑해.

제발 이 고비를 잘 넘겨줘...."




퇴원하던 날, 의사 선생님은 대동 박리는 6개월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셨다. 약도 잘 복용해야 되고, 식단과 운동을 잘 조절해 줘야 하니 옆에서 가족들이 잘 챙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루, 일주일, 한 달이 지나 엄마는 건강을 회복하셨고, 매주 본가를 오가던 오빠들과 나는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난 바쁜 직장 생활로 엄마를 잊고 살고 있다.  


엄마는 바다를 좋아한다. 출렁이는 파도를 보면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 엄마가 건강해지면 바다 보러 제주도 가자던 약속을 숙제처럼 지켜냈다. 엄마에게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주고 싶은 못난 딸의 '작은 선물'이었다. 함께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난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이게 엄마와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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