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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미 Nov 03. 2020

그래서 나는 갑니다, 제주로

장유미 님의 제주행 티켓이 발급되었습니다

"저 내일 떠나요, 제주. 하하하."

"엥? 진짜 가는 거야?"

평소처럼 육아에 전념하다 갑자기 내일 제주로 떠난다는 나의 발언에 주변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당황스럽기는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대책 없이 질러버리는 무모함이 있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으니 말이다. 말이 좋아 추진력이 강한 것이지, 가끔가다 툭툭 튀어나오는 나의 이러한 돌발 행동에 가족들은 긴장하기도 한다. 부모님은 '얘 또 시작이네' 이런 표정으로, 그러나 나를 오래 겪어온  경험으로 인해 그리 놀랍지는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멈칫하시다가도 결국은 내 결정을 늘 믿어주고 지지해주신다. 나는 36년을 데리고 살았으나 아직도 나 자신을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하겠다. 안정적이고 정해진 궤도를 걷는 다소 무미건조한 모범생 스타일, 그러나 이렇게 가끔가다 노선을 훽 바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약간의 똘기(?)를 가미한 여자. 하긴 20대 때에도 직장 내의 스트레스가 고도에 달한 어느 날, 무작정 항공권을 예약하고 다음 주에 바로 프랑스로 날아가 버리기도 했으니, 이번 제주 여행 감행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시나리오인지도 모르지.


제주 한 달 살기는 오랜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다만 그저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수많은 목록 중 하나였고 언제 어떻게 떠날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someday' 리스트로 남아 있었다. 요즘 육아에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아이가 마구 어질러놓은 거실을 정리하다가도, 식탁 앞에 앉아 뚱한 표정으로 밥 먹기에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도, 아이가 한참을 뒹굴거리다가 겨우 잠든 후에 이렇게 하루가 다 가버렸다는 허무함을 느끼며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며칠 전, 남편 앞에서 육아가 힘들다며 엉엉 울어버리고 나서 거울 속의 얼룩진 내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 나 왜 이리 못생겼지. 우니까 더 못생겨 보이네. 두 번째, 정말 떠날 때가 되었구나. 그래 가자, 어디든!


코로나 시국이다 유미야. 정신 차려라. 이 엄중한 시대에 제주 여행이라니. 그리고 아이를 어차피 데리고 갈 것이라면 그곳에서도 독박 육아가 아니니. 남쪽이라 덜 춥다고는 하지만 벌써 11월이고 날이 추워질 텐데. 한 달을 살려면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닐 텐데. 그 돈은 다 어디서 나니. 게다가 내일이 결혼기념일인데 남편을 두고 꼭 이때 떠나야만 하겠니. 그러나 내 안의 많은 우려와 걱정들이 나의 떠나고 싶은 욕구를 제압하지는 못했다. 해외를 못 가서 다들 제주로 몰린다는데 많은 인파 속을 헤매게 되겠지만, 마스크로 완전무장하고 사람 많은 곳은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리라 다짐하며 항공권을 예매했다. 친정 엄마가 함께 가시게 되어 독박 육아에 대한 걱정은 덜 수 있게 되었다. 제주는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춥겠지만, 내가 사는 제천은 훨씬 더 춥다. 결혼기념일을 함께 보내지 못한 것은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아이와 아내의 여행으로 인해 한 달의 휴가를 얻은 셈이니 이보다 더 좋은 결혼기념일 선물이 어디 있을까. 남편은 여행이란 마음먹었을 때 가야 한다며 용돈까지 쥐어주며 열심히 지원 사격을 펼쳤다.


나는 지금 애월의 바다를 보며 글을 쓰고 있다. 파도소리가 잔잔하게 들린다. 제주 속에 있으면서도 내가 떠나온 것이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항공권과 숙소만 급히 구해 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철두철미한 계획 순이'가 무계획 여행이라니. 이건 양귀자 작가의 말마따나 '콩을 눈앞에 두고 팥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나 아무 계획이 없다는 사실이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제주 가면 뭐할 거야? 어디 어디 갈 거야?' 질문을 받기도 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수학여행도 아니고, 빽빽이 짜인 일정을 소화하느라 내가 과연 제대로 쉴 수나 있을까. 비행기를 탈 때 마음속으로 했던 생각은 '관광하지 말고 그냥 쉬자.'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다만 보아도 난 행복할 것 같다. 아이가 모래놀이를 하면 그저 옆에서 지켜봐 주고, 원하는 대로 가면 몇 발짝 뒤에서 따라가 보며. 뽕을 뽑겠다는 생각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와 엄마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여행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한 무결점 계획으로 늘 다음을 예상할 수 있던 나였는데, 이번 여행은 그냥 아무렇게나 흘러가도록 놔 둘 참이다.


제주에서의 30일을 보내고 다시 돌아갈 때 내 마음의 작은 공간 하나만 생기면 참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본다. 일상을 박차고 이곳까지 날아오게 할 만큼 힘든 육아, 행복하지만 때로는 무료하고 답답한 육아를 하면서도 내 컨디션을 잃지 않고 지치지 않게 해 줄 '여유'라는 선물을 이 여행에서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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