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덴마-야엘 로드를 벤야민과 산책하기3

만화로 철학읽기-벤야민과 덴마3

by 스포쟁이 뚱냥조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뻔한 명언은 이제 현대인들의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다들 어떻게든 자신의 기대를 낮추려 애쓴다. 그러다보니 설레발이 아닌 역레발, 즉 자신의 진심과는 반대쪽으로 설레발을 치는 것이 축구 사이트 같은 곳에서는 중요한 경기 이전에 유행으로 퍼지기도 한다. 축구계의 황제인 펠레가 예언만 하면 반대로 실현된다는 속설이 퍼지니까 브라질 국민들은 월드컵 시즌에 제발 펠레가 조용히 입을 다물어주길 기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웹툰같은 대중문화 서브컬쳐의 세계에서도 대부분 캐릭터들은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듯 살아간다.




그렇지만 도저히 기대를 낮출 수 없는, 온갖 설레발을 다 쳐보고 싶은 소원도 사람마다 또 있는 법이다. 취준생에겐 정규직이, 입시생에겐 합격이 그러하듯, 웹툰 덴마 야엘로드편의 야엘에겐 최하층 계급 피코인 자신이 이 불평등한 세상을 바꾼다는 소원이 그러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힘든 현실의 억압과 차별에 지쳐서 삶 자체를 놓아버리기 직전에 놓인 야엘. 허나 미래를 보고 예언한다는 데바림 종족의 선생님이 자신이 바로 영웅의 전당에 올라가 위대한 로드 야엘로 불리게 된다는 예언을 듣게 된다면... 이 소원에 대한 기대는 끝도 없이 커질 수밖에.





하지만 이 모든 예언이 예정된 자신의 미래가 사실 거짓이었다면?데바림이 미래를 보고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그들이 항상 진실만을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현실이라면? 보통 이러면 대부분의 인간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단순히 지금의 자신이 걸어온 정도를 포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지금까지의 삶과는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역사 속 한국의 경우에도 소련이 무너지는 역사 앞에서 적지 않은 좌파 운동권들이 극우파로 전향하지 않았던가. 대중적으로 유명한 김문수나 박형준은 그중 대표적인 인물 한 두명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야엘은?



허나 야엘은 예언된 미래가 거짓이었다는 것에 무너지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예언한 미래가 설사 거짓이라 해도, 그 비전 덕분에 야엘은 차별받고 억압받는 힘든 하루하루가 행복했다고 스스로 자부하기 때문이다. 공포 마케팅에 전염되어 자기와 비슷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혐오하거나 멸시하는 길이 아니라, 그 사회의 공포에 정면으로 맞서싸우며 그 고통 속에서 현세의 행복을 찾는, 참으로 종교적인 선지자의 길을 야엘은 택했고 행했다. 벤야민도 바로 이런 삶에 대해서, 맑스가 자본론 책에서 말한 구절을 인용하며 '두더지'라는 혁명가의 모델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선 차후 또 천천히 상세하게 이야기해볼까 한다.



허리를 다쳐서 다리를 못 움직이면 양팔로라도 기어가는 구도자의 길. 어차피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역설적으로 위안이 되고, 자신에겐 포기할 것이 없으니 더더욱 앞으로 미래로 갈 수밖에 없는 야엘. 이 모든 이야기는 행성 전체에 생방송으로 전달되었고, 피코 계급 전체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야엘 몰래 생방송을 중계했던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로 야엘은 정말로 피코만이 아닌 행성 주민 전체에 큰 울림과 성찰을 주는데 성공했다. 벤야민이면 이런 장면을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기존의 반복되는 과거를 중단시키고 미래의 시간으로 도약하는 새로운 시대의 혁명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앞으로만 전진하는 기관차가 혁명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전체주의라는 폭주하는 기관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일이 바로 이 시대의 혁명이 아닐까.


그야말로 자고 일어난 사이에 행성 주민들의 꿈과 희망이자 엄청난 스타가 되어버린 야엘. 자신이 했던 말들이 생중계되는 것을 몰랐던 그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주어진 현재의 고통들을 버텨냈을 뿐이고, 재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최선의 행복을 추구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허나 바로 그런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크나큰 감동과 미래를 여는 작은 희망의 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피코 야엘에겐 자신의 길을 먼저 걸었던 역사의 선배 또한 존재했다. 벤야민이라면 이 선배를 바로 앙겔루스 노부스, 역사의 폐허 속에서 끝없이 진보의 폭풍이 불어오는데도 과거의 잔해를 주워담으려는 새로운 천사의 이미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 속에서 최하층 계급인 수드라보다 낮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 불가촉천민 계급이 있듯이, 사실은 피코 야엘에게 엄격히 대하던 국회 의장이 바로 피코보다도 키가 작고 낮은 계급 출신이라는 반전이 나온다. 물론 국회의사당이 무너져서 의장이 다리를 다치자 기계몸이 나온 시점에서 이를 벌써 눈치챈 날카로운 독자도 있었을테지만, 나로선 이 복선과 반전에 실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 야엘로드 편부터 사람들이 양영순의 스토리텔링에 깊이 공감하고 훗날 덴경대라 불리게 되는 적극적인 지지 독자층이 형성되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야엘의 영웅적 신화 스토리가 아니라, 이런 세세한 디테일이 양영순의 덴마가 다시 봐야하고 한국 웹툰의 역사의 기억안에 남겨둘 만한 근거로 충분치 않은가 나는 감히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야엘로드의 결말 이후의 50년 뒤를 살짝 보여주는 에필로그에서, 나는 두 가지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50년 뒤의 대화들은 분명 키가 작든 크든 계급이 낮든 높든 평등이 대화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그 와중에 피코출신 야엘은 왜 굳이 키를 크게 그렸을까? 50년이나 걸려서 국회의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저 야엘조차도 결국 국회의장이 기계몸을 타고 키를 키웠듯이 상층 출신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처사인 것일까? 정치인이 누구나 국회에서 정장을 입어야 하듯이? 그 유시민조차도 국회에 처음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다가 동료 의원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다음날부터 말끔한 정장을 입었듯이 양영순의 현실 풍자인 걸까?



그리고 과연 야엘이 던진 질문인 행복이란 무엇일까? 야엘은 행복이란 마치 자명한 개념인 것처럼 쉽게 말하지만 과연 행복이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말이던가??... 이에 대해서 양영순은 만드라고라 편에서 행복이란 무엇인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나름의 대답을 내놓은 듯하다. 이제 다음 편에서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 야엘처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도망칠 수 있을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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