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시대마다 원하는 것들이 각자 다르지만 아마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되거나 이루게 된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다들 기대합니다. 그런 면에서 모두가 행복을 원하고 쫓아다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 세상에 불행을 추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 않을까요.
심지어 자신은 불행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마저도, 그 발언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만족을 추구하는 모순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행복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이는 수천년 전부터 인류의 오랜 과제였고 철학에서도 주요한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웹툰 덴마의 야엘로드 에피소드에서도 중요한 질문으로 독자에게 던져집니다.
신장차이와 계급이라는 외적 요소로 인해 벌어진 극심한 차별과 억압으로 국회의사당이 무너지는 재난이 일어날 정도로 갈등이 심했던 행성 네게브. 그 중에서 최하층 계급 피코인 야엘은 국회에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그렇게 자기보다 낮은 계급을 멸시하고 혐오하던 자들에게 자신의 마음 속 외침을 꺼냅니다. 그렇게 멸시하고 차별해서 당신은 행복한가? 이 행성 네게브라는 공동체는 과연 행복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 만한 공동체인가?물론 이 질문을 던진 당사자인 야엘에게도 당연히 이 말은 되돌아올수 있습니다. 이에 야엘은 이렇게 답합니다.
야엘은 이전 편에서 비록 선생이 자기에게 역사적 위인이 될 거라는 거짓된 미래를 예언했고 그 때문에 매일매일 차별과 수난을 당했음에도 자신은 행복했다고 말한다.왜냐하면 야엘은 그 힘든 삶 속에서 하루를 버텨냈던 힘을, 넘을 수 없는 벽에 맞설 수 있게 하던 힘을, 오늘보다 내일이 기다려지게 하던 힘을 그 거짓예언 덕분에 기를 수 있었으니까. 마치 니체의 힘에의 의지나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자기보존노력을 떠올릴 만한 야엘의 독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같이 삐딱한 독자로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다. 야엘은 굉장히 운이 좋은 사례에 불과한 건 아닐까.
국회의장이 차후에 말했듯이 야엘은 운좋게 미디어 생중계 덕분에 잠시 떴을 뿐이고 이후 최하층계급의 영웅으로 대우받은 것은 행운의 덕이 큰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 야엘같이 주위의 수많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초인적으로 노력했음에도 과연 이렇게 우연에 기대야 하는 삶을 행복이라 말할수 있을까 등등...
어쩌면 작가 양영순도 이런 점을 의식해서 그 다음 에피소드인 만드라고라를 그려낸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행복이, 즐거운 삶이 무언인지를 알려면 현재의 억압과 고난 외에도 뭔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만드라고라를 만들던 수녀 나오미는 그걸 위해 창조된 캐릭터가 아닐까.그리고 일생동안 유럽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수많은 기록을 남기고, 마지막으론 나치를 피해 유럽을 떠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으려다가 음독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벤야민의 사유도 어쩌면 나오미수녀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나는 이렇게 떠올려본다.
행성 위노바, 한 작은 수도원의 나오미 수녀는 그야말로 중노동에 하루종일 시달린다. 환자 간병에 청소에 빨래에 음식까지... 하루에 하나만 해도 사실 충분히 피로에 지칠 노동인데 이 많은 노동을 나오미 수녀는 모두 떠맡고 있고, 심지어 같이 일하는 수녀들 사이에서도 나오미 수녀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그 와중에 건강이 좋지않은 원장 수녀님에게 작게나마 하나의 조언을 듣게 된다...
이전에 나오미 수녀의 건의대로 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사회의 낮은 존재인 동네의 노숙자, 걸인들을 수도원에서 보살피게 되자, 동네 신자들의 수도원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진다. 게다가 수도원 토지의 소송에서도 져버려서 신의 성전을 용역 깡패가 노골적으로 폭력을 쓰며 쳐들어오고 협박을 일삼는다. 이렇게 나오미 수녀는 안밖으로 압박을 받으며 삶에 지쳐가는 중에, 원장 수녀님에게 작은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게 된다.
재산권의 정당한 법적 행사라는 신성한 권리를 내세워서 종교라는 이전의 신성을 폭력으로 짓밟고, 심지어 생일날 수녀를 때리고 철거집행 통지서를 수녀의 몸에 붙이는 이 장면은 정말이지 인상적인 양영순의 연출이다. 세계 역사에서도 기독교는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유일신의 논리였지만, 지금 21세기엔 누가보아도 기독교보다 자본주의가 더 전세계적으로 우세한 유일한 신성의 논리가 아닐까. 물론 이렇게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벤야민적인 시선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벤야민이라면 오히려 20세기 자본주의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정신적인 종교와 물질적인 자본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의 알레고리, 우화야말로 마치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신포도의 이솝 우화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고 말해줄 테니까. 여튼 나오미 수녀는 더이상 이런 고통과 억압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도피를 결심한다.
이렇게 딱히 목적지도 없이 지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다는 마음으로 떠난 나오미수녀. 허나 떠난 곳에서도 부랑자에게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는 등 수난은 계속된다. 허나 수녀는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 경험도 없고 돈도 없어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른다. 유대인 말살정책을 펼치던 나치를 피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으려던 벤야민도 마치 이런 심경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칫 놓치기 쉬운 복선을 매우 친절한 베스트댓글이 탁 하고 잡아준다. 나오미 수녀가 정처없이 따나서 도착한 지역 에벤에셀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를 베댓처럼 나오미 수녀의 선행, 만드라고라 마스터로서 살아오고 베풀어온 그녀의 업이 이 먼 도시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풀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을 더해보자면, 나오미수녀는 그저 별 목적없이 그저 지금 여기, 고통스런 현재에서 가장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조차도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수녀을 이끈 것이고, 덕분에 나오미는 그동안 고생한 것의 보답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어쩌면 칼뱅의 예정설처럼, 나오미의 이 돌발행동마저도 신의 입장에선 다 예견된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위노바 행성의 특산물인 건강식품 만드라고라. 이 식물은 가장 많은 애정을 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며 그 형상대로 꽃이 피는 신기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건 위에 나온대로 수도원에서 그 중노동을 나오미수녀가 감당하는 가운데 또 애정을 가지고 만드라고라를 키워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단순히 나오미수녀가 일반인 이상의, 앞선 에피소드의 야엘처럼 초인에 가까운 존재인 걸까??아니면 야엘같은 초인이 아니라도, 벤야민의 표현을 살짝 빌려서 행복에 가까워지는 '메시아가 열어놓은 희미한 작은 문' 은 존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