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밖으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나오미수녀에게 원장수녀님은 아픈 와중에도 이런 말을 남겨주었다. 이제 왜 그녀가 그런 말을 남겼는지 다시금 알아볼, 벤야민 식으로 말한다면 과거를 회억, 회상하고 기억해볼 시간이다.
수녀원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친 나오미 수녀. 하지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서 의외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음에도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이 원했던 곳이, 자기가 즐거운 곳이 아니었으니까. 복에 겨운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오미는 만드라고라를 재배하는 농부일 때나 병자를 간호하는 간호사일 때나 신의 종으로 하루종일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수녀일 때가 가장 즐거웠다는 것을, 그 장소를 떠나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다뤘던 철학자 하이데거도 딱 이런 상황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무언가가 부재할 때 우리는 진실로 그 존재에 대해서 깨닫는다고. 물론 꼭 철학자의 이런 언어가 아니더라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으로도 왜 나오미 수녀가 이제서야 그것을 깨달았는지, 수녀원을 떠난 이후로 처음으로 저렇게 손에 쥔 상품들을 내려놓고 예수나 부처를 떠올리게 할만한 미소를 짓게 되는지 알게 되는 이유로 충분하리라.
그리고 이제수녀원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이전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너무나 힘들어하는 후배를 만나고 원장수녀님이 말한 말씀을 계속 전해준다. 도망치라고. 자신은 이미 잘 다녀왔다고. 심지어 이 후배의 이름은 마리아, 덴마의 세계에 기독교는 없고 그와 닮은 종교들만 있지만 예수를 낳았다는 성모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이름이다. 순전히 자의적 해석이지만, 나오미라는 이름 자체도
나오더라도 (바깥으로)
미me 나에게로 돌아온다
라고 양영순이 의도한 것은 아닐까. 물론 마리아는 서양에 한국의 영희만큼이나 흔해빠진 이름이고 이 모든 게 나의 이른바 뇌피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허나 이런데 바로 리뷰적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는 쾌감이 아닐까.
생명이라는 건 천주님이 이 우주 곳곳에 보편적으로 일어나게 한 가장 즐거운 에너지 흐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마치 스피노자가 기쁨의 정서에 대해 말한 부분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흔히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함께 서양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 철학을 개시한 이성을 중시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 동시에 기쁨이나 명예욕같은 구체적인 인간의 정서에 대해 매우 상세히 다룬 섬세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벤야민도 이런 스피노자나 니체의 철학을 분명히 읽었고 영향받은 기록들이 그의 저서 곳곳에 남아있다. 아마 그래서 벤야민은 20세기 나치의 파시즘이 휘몰아치는 유럽의 거리에서 빈민과 창부와 산책꾼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과 정서에 대해 살펴보고 수집하며 자신의 역사철학을 다듬어나간 것이 아니었을까...그리고 나도 바로 그런 수집가이자 산책가로서 벤야민의 문장과 마음을 훔치고 흉내내고 싶어서 이 연재글을 시작한게 아닐까.
이제 나오미수녀는 자신에게 확신이 생겼다. 떠나보고 나서야 그곳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공간, 즐거운 삶이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도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에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다가, 자신의 연인인 아샤를 보기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가 돌아오고 모스크바의 일기를 남긴 것도 바로 이런 나오미의 마음과 닮아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이런 정서를 다시 느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글을 마무리하면 나름 감동적이고 훈훈한 흔한 결말이리라. 하지만 나는 또 마음 한켠에서 삐딱한 작은 아이가 고개를 들고 입을 삐쭉 내민다.
사실 나오미 수녀도 이전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능력있으면서도 운까지 좋은 일부 사례에 불과한건 아니냐고. 만드라고라 마스터로 이미 하나의 엘리트 기술자였고, 여행객이 타지에서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면 보통 패닉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기 마련인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도시의 시장이 그녀를 구해주러 오는건 지나치게 그녀에게 편리하고 작위적인 전개가 아니냐고.
또한 이 에피소드의 스토리 전체가 그 각자 다양하고 수많은 일상의 고통과 고난을 자칫 개인적으로 버티고 즐기면 된다고 정당화하는건 아니냐고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을 법하다. 천년도 더 전에 로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시절부터 기독교의 이런 서사는 매우 고전적인 레파토리 아니었는가. 현재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미래에 더 큰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서사. 이는 자칫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저 구원은 미래에, 심지어 죽음 뒤에만 존재하니 현실에서 무슨 고통을 받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종말론, 메시아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 이제 다음 글에서는 이 기독교의 해방 서사에 대해 좀 더 깊게 다뤄보기로 하자...21세기에 오히려 종교는 더더욱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중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게 되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모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