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라는 유사종교와 아프니까 청춘?의 벤야민

벤야민과 만화라는 폐허 산책2

by 스포쟁이 뚱냥조커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1.

나를 가져봐! 그러면 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거야! 라고 외치는 광고가 세상 천지에 깔려있고 돈만 된다면 사람 신체에도 광고판을 새겨놓는 21세기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세상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재벌 이재용이든 서울역 노숙자든 원한다고 해서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는 건 자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으로 종종 화폐, 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 자본주의가 없는 시공간을 상상하고 꿈꾼다. 그리고 그런 시공간이 우리 인류의 역사상 분명 없지는 않았고 사실 지금도 존재한다. 그 실제적 사례를 들자면 역시 절이나 수도원같은 종교인들의 공동체가 대표적이리라. 또한 혁명과 해방을 외치며 중세 코뮨 도시같은 유토피아적 사회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실험들도 그 사례로 들수 있다.


아 물론 나의 이 말에 대해 뉴스를 자주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고기먹고 술먹고서 단체 도박을 하던 땡중이나 헌금 경쟁을 장사하듯 부추기는 부패한 대형 교회의 뉴스를 분명 떠올릴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 공동체를 쉽게 다 타락했다고 거기엔 아무런 해방의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하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그 자체일 뿐이다. 수도원같은 공동체라고 해서 돈 자체가 없는 곳은 아니지만, 분명 엄격한 계율 아래에서 사유재산 자체가 없다시피 하고 오로지 신의 이름으로 봉사에 힘쓰는 신부님과 수녀님 종교인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런 종교단체는 조계사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처럼,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려는 전 간부나 정권의 노동탄압을 막으려는 노동조합 회장이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하려 찾는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해방의 공간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자본주의가 아닌 해방의 공간을 찾으려고 모스크바로 떠났던 벤야민과 뛰어난 약효을 가진 만드라고라 마스터인데도 수도원을 향했던 덴마의 나오미수녀에 대한 이야기다.




2.

수도원 같은 폐쇄된 작은 존재가 이미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지 오래고, 막스 베버같은 사람이 말한 것처럼 탈주술화가 진행된 근대 이후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무슨 큰 상관이 있느냐고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철학적 사상적으로 봐도 우리는 이미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에 살고 있고 니체가 선언했듯이 신은 죽었다고 봐야 되는게 아니냐고. 하지만 단순히 기존 종교의 유일신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현대인들은 종교로부터 멀어졌을까. 그렇다면 수도원같은 신의 성전에 대해 다루기 전에 지금 우리 시대의 유사종교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이런 철학 아재 개그가 먹히는 날이 올 줄이야...




지난 글에서 말한 유시민/진중권과 웹툰-덴마라는 새해 첫날의 두 폐허를 목격한지도 벌써 세달 째, 이제 날씨는 분명 겨울이 지나갔고 진부한 말이지만 개나리와 벚꽃이 슬슬 기지개를 켜려고 한다. 허나 매서운 코로나 사태는 종식은 커녕 글로벌하게 점점 장기화되는 듯하다. 세계경제의 침체는 확실시되고 선진국들의 예상 경제성장률은 거의 다 마이너스를 찍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믿고 있다. 지금이 이렇게나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결국 다 회복하고 다시 성장하리라는, 끝없는 성장신화라는 유사종교를. 도대체 이 근거없는 믿음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한상원의 저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을 참고해서, 천년도 더 전에 기독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413-426)에서 이런 끝없는 성장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찾을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한때 로마 제국은 지금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의 뿌리였고 거대한 영광 그 자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많은 환난끝에 이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받았고 이천년뒤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허나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에 이 로마의 국교는 심각한 위협에 시달렸다. 이교도이자 야만족으로 불렀던 서고트족의 군사적 침입과 패배로 로마는 엄청나게 흔들렸고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구원에도 당연히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역사철학의 창시자 또는 역사철학 일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존 그리스 철학의 원형적 시간관 즉 사계절이 순환하듯이 세계는 끝없이 반복된다는 시간에 대한 관점을 벗어난다.


그는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은 무한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설정한대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마지막엔 최후의 심판과 구원이 기다린다는 직선적(선형적)시간관을 전개한다. 이 최후의 종말, 심판 또는 구원이 예정되어 있기에 지금 현실의 어떤 고통도 사실 언젠가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미래의 영광과 구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현재의 비극을 견뎌낼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기에 이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몸으로 받아들인다. 허나 이는 어쩌면 언젠가 경제가, 내 주식은 오를거고 내 살림살이가 좋아질 거라고 순진하게 믿을 수밖에 없는 21세기 우리네 삶과 구조적으로 그다지 다를바가 없지 않은가?




3.

'영원한 경제성장'이라는 사이비 종교스러운 언어처럼 지난 10년 사이 가장 그 의미 내지 뉘앙스가 변해버린 말로는 뭐가 있을까. 수많은 후보군이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2030세대에서는 아마 ‘청춘’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김난도가 백만권 넘게 팔아먹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 신드롬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행적과 사회적 냉대에 실망한 수많은 진짜 청춘들의 반항 내지 저항은, 유병재라는 코미디언의 말 한마디로 종결된 듯하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나오미수녀의 고난 그야말로 이런 청춘과 고통에 대한 하나의 스케치라고 볼수도 있을 듯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난 글에서 말한 벤야민의 사유-이미지 실제적 사례를 수집하고 산책하고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재구성해볼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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