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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Jul 10. 2024

실수가 메달이 되는 여행

친구들과 발리로 여행을 떠났다. 같은 직장에 함께 입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정년 퇴직하게 된 동기들이다. 얼마 만에 떠나는 패키지여행인지. 요즘은 자유여행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일정과 숙박을 여행사에서 처리해 주는 패키지여행이 편안함에서는 최고다. 


패키지 여행이라지만 요즘은 사전 수속 등을 인터넷으로 처리하니 각자가 해야할 절차가 있었다. 출발 전날 밤 여행 단톡방이 시끌시끌하다. 비자 신청에서 여권 사진 업로드가 안 되어 스트레스 받았다는 이야기부터 '예전에는 여행사에서 다 처리해줬는데...'라고 구시렁 대고 있다. 나 또한 인터넷 비자신청에서 에러가 나자 어물쩍 핑계를 대며 딸에게 처리를 맡긴 신세다. 평생을 컴퓨터 앞에 앉아 일했다는 사람들이 직장의 그늘을 벗어나니 하루 아침에 어리바리한 사회 초년생이 되어 버렸다. 


여행지에 대한 공부를 하고가야 제대로 즐길 수 있을텐데 여행 전에 뭐 그리 챙겨놓고 가야할 일이 많은지. 전날까지 끙끙대다가 떠나는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집을 나왔다. 그래도 일단 공항에 도착하여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보자 모든 집착과 우려가 한 방에 날아갔다. '에라 모르겠다. 즐기고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승강장으로 들어가서 막간을 이용해서 간식도 먹고 차도 마셨다. 실제 여행의 즐거움은 출국 전 공항에서 이륙장에 서있는 비행기를 보며 차 마실 때가 아닐까. 앞으로의 여정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지만 일단은 기대에 가득차 있으니까. 


밤 비행기를 타고 한숨 자고 나니 인도네시아 공항이다. 입국장을 통과할 때 관광세 납부와 인터넷 비자 신청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친구 때문에 한 차례 헤프닝이 벌어진 후에야 공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실수를 하여 모두를 진땀 빼게 한 친구에게 벌점을 부여했다. 여행 기간 중 가장 많은 점수를 받은 사람에게 메달을 줘야겠다고 하면서. 


어떨떨한 상태에서 좁은 골목을 곡예운전으로 통과하여 호텔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숙소가 있는 오층에서 내려다보니 어젯밤의 어수선함은 다 감추어지고 우거진 열대의 나무들과 파란 하늘 그리고 아름다운 호텔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이제부터는 일정에 정해진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호텔 뷔페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니 우리를 싣고 갈 버스가 호텔 앞에 대기하고 있다. 가벼운 차림으로 차를 타면 하루 즐길 준비 끝이다. 두고 온 일이나 집안 걱정은 저편으로 접어두고. 


발리섬은 신혼여행지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역시 풍광이 아름답다. 아무 곳에나 서기만 하면 멋진 사진이 만들어진다. 우리 일행 여덟 명만으로 단일팀이 구성되었다. 숫자가 많은 단체여행에서는 더러는 불쾌한 일도 생기는데 일단 그룹 구성에서부터 자유를 즐길 조건이 다 갖추어진 셈이다.


여행 프로그램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유명여행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다와 섬, 그리고 비치로 이어진 아름다운 풍광과 해상스포츠까지 나로서는 잘 즐기지 못하던 동남아의 밤과 낮을 경험했다. 호텔 루프탑 풀 바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맥주 잔을 부딪히며 춤을 추던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다. 사무실에서 서류만 만지작거리던 범생이들에게 이런 끼가 있었다니. 


자잘한 사건과 헤프닝들은 혹여 여행이 밋밋해질까 마치 일부러 짠 프로그램 같았다. 바닷가에서 인생 샷 찍다가 비싼 안경을 잃어버린 일부터 울루와뚜 사원에서 한 명의 멤버 실종사건, 한식당에 냄새나는 과일 두리안을 가지고 들어가서 먹다가 쫓겨난 이야기는 양념에 불과했다. 귀국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는 순간 마사지 숍에서 잃어버린 점퍼를 찾기 위해 cctv까지 동원한 사건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했다. 오토바이로 급송된 점퍼를 공항 진입로 대로변에서 건네받던 순간은 여행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친구들과는 30년이 넘게 같은 직장에서 일해왔지만 이렇게 가깝게 여러 날을 함께 한 경험은 거의 없다. 입사 동기이지만 승진 시기가 서로 달라 때론 상사와 직원으로 껄끄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걸 일 처리라고 한 겁니까?’라는 질타를 주고 받기도 한 관계이다. 그래서 일로 만난 직장 사람들과는 퇴직하면 관계가 끝나기 쉬운데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 오래 함께 즐기는 친구 로 남아 있다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가장 많은 실수를 하여 여행 중 즐거움을 안겨준 친구를 ‘실수왕’으로 뽑아서 칭송했다. 사무실에서 실수는 질책의 대상이었지만 우리의 여행에서 그 실수는 빛나는 메달이 되었다. 은퇴하면 마냥 자유로울 것 같아도 친구들과 날짜 맞춰 여행하기가 쉽지 않다. 정기적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집안 사정, 손주 돌보기, 모임과 이벤트 등으로 은퇴자의 일상도 별로 공백이 없기 때문이다. 짧지만 즐거운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어 참으로 좋았고, 무엇보다 다들 건강하게 이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좋은 벗들과 함께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은퇴자의 가장 큰 행복이다. 실수도 메달로 빛날 수 있는 이 관계가 오래 계속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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