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회의 여행은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서두르며 어린 시절 소풍처럼 마음이 들떴다. 모든 여행의 성패는 당연히 사람 반, 풍경 반이다. 시월 중순의 풍경은 떠나기 전부터 고득점이 예상되었다. 날씨가 이미 한몫하고 있었으므로.
여느 여행단체와 다름없이 대형 버스를 빌리고 간식거리가 준비되었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낸 옷차림의 일행이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김밥과 떡이 돌려지고 봉지마다 고루 담은 과자와 과일까지 푸짐한 아침 식사가 되고도 남았다. 창밖을 보니 가을 들판이 황금색으로 깔려있다. 추수가 끝나서 볏짚이 바닥에 드러누운 논이 반이요, 아직 알곡을 달고 뒤늦은 수확을 기다리는 벼가 반이다.
차 안에는 마이크가 돌고 있었다. 문우 한 분이 한강 작가의 노벨상을 언급하며 그녀의 등단 시인 ‘서울의 겨울’을 낭송한다. 뒤이어 이기철 시인의 ‘이화령쯤에서’와 노천명의 ‘고향’으로 시 낭송이 이어졌다. ‘살아 있는 것들은 나무도 짐승도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이기철 시인의 이화령쯤에서) 여행의 초입에서부터 들려주는 시인의 언어는 풍경을 그저 해맑은 풍경으로만 지나치지 못하게 하려나 보다.
문학여행의 목적지는 증평이었다. 충청북도 북부에 있는 인구 삼만 칠천여 명의 작은 지역이다. 군수님의 자랑에 의하면 지방 도시 중 유입이 아닌 출산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라니 아이 키우며 살기좋은 지역이라 짐작된다. 관광객의 관점으로 보면 전국의 내로라하는 명승지에 들만한 곳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지방이든 속속들이 아름다운 풍광이 있고 소박하게 꾸민 관광자원이 있다.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가보면 사람 구경하고 돌아오기 일쑤다.
이번 증평 기행은 문학여행답게 조용한 증평을 즐기는 코스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증평 민속박물관에서 시작해서 보광 천변에 넓게 자리 잡은 미루나무숲으로 갔다. 청명하고 높푸른 하늘과 눈이 부시도록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뚫고 공중으로 치솟은 미루나무들을 올려다본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 뜨겁던 계절에 매미 소리 귀를 울리던 고향의 미루나무와 똑같다. 작은 키에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보던 그 나무, 어른이 되어서 올려다봐도 한없이 높다. 실바람이 몰고 와서 걸쳐놓은 도망갔다는 동요처럼 꼭대기의 조각구름까지.
근처에 있는 김득신 문학관으로 갔다. 김득신은 고려 중기 시인이자 독서가인데 책을 어찌나 열정적으로 읽었는지 후대에 독서왕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삼십일 세부터 육십칠 세까지 만 번 이상 읽은 서른여섯 편의 고문을 기록한 독수기라는 기록을 남겼다. 수업이 과거에 떨어진 둔재로 포기하지 않고 수도 없이 반복해서 고전을 읽은 후 서른이 넘어 소과에 합격한 인물이니 포기하지 않는 반복 학습의 본보기로 삼을만하다. 이 시대 작가들에게도 새로운 배울 점을 주는 인물이다. 문학관에서 소개 영상을 나란히 앉아서 시청하는데 김득신을 만든 사람은 늦된 그의 학업을 말없이 지켜봐 준 부모님이 일등 공신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옆에서 한없이 기다려주는 믿음만이 누군가를 성장시키고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한다.
증평에는 소월 문학관이 있다. 소월 시인의 자료를 모아 경암 이철호 작가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어떤 한 작가를 흠모하여 그의 작품을 모으고 정리하여 기념관을 만드는 데는 돈도 필요하지만, 사랑과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작품이야 인터넷을 검색하면 자세하게 나오겠으나 그 이름, 육필 원고, 오래된 책 냄새는 기념관이 주는 이 시간만의 감동이다. 소월 시는 쉽게 읽히고 대중의 정서와 가까워서 유난히 노랫말로 많이 쓰였다.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모두 익숙한 노래 제목이다. 기념관을 돌면서 소월의 시로 그 가사를 음미하니 아름다운 선율이 내 몸을 휘감아 도는 듯하다. 김득신 문학관을 다녀올 때도 그랬지만 이 소월 문학관 이층에 자리 잡은 경암 문학관을 돌면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몇 권의 책을 남길 수 있을까. 숫자가 아니라 읽은 만큼 성장하고 쓰는 만큼 성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독서록과 작품록이 남아 후대인의 발길을 잡는다니 이 얼마나 황홀한 기대인가.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라는 그 한 구절을 얻기 위해 수없이 버렸을 옛시인의 고뇌를 알기에,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작품이라도 후대 누군가의 손에 들려 읽힌다는 상상만으로도 벅차다.
청명하게 하늘 드높고 흰 구름 조용하게 떠가는 가을의 한복판이었다. 증평 여행은 나의 폐부 안으로 시원한 바람을 마구 들여보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날 떠난 문학기행, 미치지 못하는 먼 거리에 있지만 마치 한 울타리 안에 든 동료의 영광인 듯 가슴 들뜨면서 하루를 보냈다. 집을 떠날 때 머릿속에 잡다하게 뒤엉켰던 일상의 잡념은 어느덧 사라졌다. 시인이 보는 풍경이 신의 모습을 닮았다면, 이 가을 소풍은 시인의 숨결을 수줍게 내 안으로 살짝 안아 들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