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작가의 <낯선 시간 속으로>는 읽기에 버겁다. 관점과 시점, 이야기의 앞과 뒤가 멋대로 바뀌어 혼란스럽고 모호하다. 그럼에도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극사실주의'라 평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처럼 모호하고 모순적이며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전개가 깔끔하다? 그것이야말로 비현실적 판타지다.
실제 세상의 모습,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명쾌하게 진리를 외치는 자, 진리를 확언하는 자의 주장은 도리어 진리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세상의 진리가 그처럼 '사이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 자체가 모호한데, 그걸 속 시원히 풀어내는 건 작가적 재주일 수는 있어도 진리의 파수(把守)행위는 아니다.
사이비 교주의 전공이 바로 이것이다. 전(前) 교인 한 명은 왜 교주를 따랐느냐는 질문에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성경 말씀을 너무나 명쾌하게 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좋았을 것이다. 세상의 진리도 아니고 심지어 종교적 진리를 그토록 간명하게 설파했다면, 그 자체로 교주는 자신이 사이비라 자백한 것임을.
사이비는 종교에만 있지 않다. 정치에서 진리는 정의(正義: justice)다. 여러 구성원이 모여 사는 사회의 특성상 무엇이 정의인지 합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미리 정해 둔 원칙과 법률을 일차적 기준으로 삼고 토론과 조율을 거쳐 정의를 향해 어렵게 나아간다. 그런 과정을 부정하면서 '이것이 곧 정의'라고 시원하게 외치는 자가 바로 사이비다. 사이비 교주가 그러하듯,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군중을 선동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안타깝지만 종교에서든 정치에서든 사이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진리보다 확실성을 선호하며, 모순을 끌어안고 진리를 궁구하기보다는 단순한 지침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런 심리를 사이비가 파고들어 온 나라가 몸살이다. 사이비 신도들은 사고의 단순성만큼 행동에도 거침이 없다. 다음번엔 어디가 박살날까. 서울구치소일까 헌법재판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