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른환경 21화

해피엔딩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에필로그.

by 김커피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 반에는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가 있었다.

지금까지 이름도 얼굴도 정확하게 기억나는 친구 M과 나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마주쳐야 인사를 할 정도랄까. 나는 그게 M이 낯가림이 심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여덟 살의 나는 구구단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지만 강단 하나는 있었다. 다 같은 반 친구인데 한 사람만 따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나라도 그 친구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반 아이들은 그런 내게 반복해서 말했다.

"야. 니 왜 쟤랑 놀아주는데? 놀지 마."

놀지 말라고 하면서 놀지 말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친구들에게 나는 항상

"놀아주는 게 아니고 내가 좋아서 같이 노는 거다. 우리 반 친군데 같이 노는 게 당연하지."

그나마 내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는지 아이들은 그때마다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진 않았다.


M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내가 부담됐는지 경계하다가 그 경계를 느슨하게 풀 때쯤 내게 물었다.

"오늘 학교 마치고 우리 집에 놀러 갈래?"

그래. 친구라면 방과 후 집에 놀러 가기는 필수지! 나는 좋다고 말했다.


저학년 중의 저학년인 1학년 수업은 4교시면 끝이 났다. 선생님의 종례가 끝나자마자 나는 얼른 책가방을 챙겨 M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M은 집으로 간다고 했으면서 나를 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데려갔다. 물어보니 집이 산 올라가는 길에 있다고 했다. 집이 산에 있다고? 신기했지만 M이 민망해할까 봐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따라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할아버지를 따라 오르던 낮은 산이었다. 약수터에서 물을 몇 병 받아다가 내려오는 길에는 소에게 풀을 뜯어주곤 했던 추억이 깃든 장소. 조금 더 올라가니 M의 집이 있었다. 종이에다가 그리라고 하면 지금이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이 아주 단순했던, 농촌드라마에서 나올 것 같은 그런 집이었다.


삐걱거리는 마루에 앉아 M이 서툰 솜씨로 가스버너에 끓인 라면을 먹고 흙바닥인 마당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을 때였다. 문이라고는 딱히 없었던 집의 뚫려있는 입구 쪽으로 시선을 둔 M이 갑자기 일어나서 경직된 모습으로 뻣뻣하게 서있었다. M의 시선 그대로 나의 시선도 따라갔다.


젊은 남자 어른이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M을 향해 세게 발차기를 했다. M은 장풍이라도 맞은 듯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일어날 새도 없이 그 사람은 넘어진 M을 마구 찼다. 얼굴만 빼고 온몸을 향해 무서운 어른의 두 발이 뻗쳤다. 그때 나는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순간 내 눈앞에 번개라도 번쩍 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겨우 뒷걸음질을 쳐서 집밖으로 나가 뒤도 보지 않고 달려 내려갔다.


충격이 너무 컸던 건지 일주일에 한 번씩 다니던 산인데도 길을 잃었다. 다행히 낮 시간이라 얼른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환각이었던 건지 진짜로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동물의 유골 같은 것도 보았다. 최초로 공포의 기분을 느낀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처음으로 악몽을 꾸었다. 가족이 전부 나를 버리고 가버리는 꿈이었다.

꿈속의 나는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 나를 지켜줘야지. 혼자 어떻게 하라고." 울부짖었다.

그 악몽이 아침까지 이어졌는지 자면서 울어대는 걸 보며 놀란 할머니가 나를 깨웠다. 베고 있던 베개에 눈물이 젖어 축축했다.


아마도 폭력의 간접경험으로 인한 불안함이 꿈으로 나왔던 게 아닐까. 낮에 있던 일 하나로 확장해석된 꿈을 꾸는 여덟 살인데. 작고, 소중한 여덟 살 아이를. 그 사람은 M의 아빠일까? 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렸을까.

학교에 가기 싫었지만 어른들을 걱정 끼치기도 싫었기에 억지로 세수를 하고 억지로 밥을 먹고 억지로 가방을 메고 학교를 갔다.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M의 자리를 봤다.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M의 얼굴 옆쪽으로 상처가 보이는 듯했다.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았고, 내가 아픈 것처럼 아팠다. 그렇지만 M은 나를 유령 취급했고 그렇기에 나는 M에게 괜찮냐고 물을 수 없었다. 아는 척도 안 하는 M에게 화도 났지만, 그것보단 미안한 마음이 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사람은 M의 삼촌이었다. 내게도 삼촌들이 있었는데 삼촌의 친구 삼촌들에게조차도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던 내게 그가 삼촌이라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집에서 꿀밤 한 대 맞아본 적도 없는 내겐 그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날의 기억은 수시로 나를 괴롭게 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라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아니, 후회라는 행위가 적용될 나이도 아니었다.



한 번씩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생각해 본다. M은 잘 살고 있을까?

환경이라는 범위를 생각하면 가늠되는 이야기들이 부정적이지만 난 좀 긍정적으로 결론짓는다.

M은 그럴 거야. 묵묵하게 학업을 해내고 안정적인 직장과 사람을 얻고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많은 사랑을 주면서 그렇게 잘 지내고 있을 거야.


M에게 미안했던 마음은 내가 어른으로 자라는데 어떤 영향을 준 걸까. 뭐라 표현할 방법도 없고 딱히 알 수도 없지만 분명한 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그렇게 흡수하듯 스며든 M의 기억이 나를 말하게 하고, 화내게 하고, 울고 웃게 했을 것이다. 지켜야 할 사람을 지켜줄 수 있는 주체적인 어른으로 성장하게 했을 것이다.


M의 본명은 흔하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SNS 같은 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다만 이런 마음이 있다. 누군가에게 해피엔딩의 기회가 딱 한 번 주어진다면 그건 꼭 M에게 주어졌으면 한다고.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듯 글을 썼다.

정화되지 않은 모든 사실을 쓰기에는 내 치부가 다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내가 자라오는 환경에서 큰 영향을 준 사건들에 대해서 대부분은 여기에 담긴 것 같다.

아직도 성장 중인 어른이지만, 또 언젠간 그 성장통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줄곧 마음의 짐이며 비밀이었던 내 어린 날의 친구에게 안녕하냐고, 안녕하라고 인사하는 진심을 담아 오늘로 <어른환경>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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