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른환경 20화

모르는 아저씨가 사탕을 주겠다고 했다

by 김커피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독립적인 교육을 받은 나는 어린아이에게는 꽤나 먼 거리까지 심부름도 곧잘 다녔다. 심부름을 하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고 싫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어진 임무를 완료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뿌듯해하곤 했다. 한 번씩 손에 꽉 쥐고 가던 지폐를 잃어버린 채 맨손으로 돌아가 혼난 적도 있지만, 나는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기분이 좋아서 심부름을 즐겼다. 그걸 했다고 용돈을 받는 것도 아니었는데 난 아마도 어릴 적부터 성취감의 맛을 알았던 것 같다.


심부름을 자주 다니던 일곱 살 쯤의 일이었다.

그날 심부름의 내용까지도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가 드시던 두통약을 사러 약국에 갔던 날이었다. 주말 아침이라 시장 끄트머리에 있는 큰 약국으로 가야 했는데, 이른 시간에는 시장에 있는 모든 곳이 문을 열지 않아서 영화 속에 나오는 유령도시처럼 고요했다. 그래도 해가 뜨고 한참 후의 밝은 때라 두려움 없이 큰 시장을 가로질러 약국으로 가던 길이었다.


엄마가 옷을 사준 적이 있는 아동복 가게 옆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아주 좁은 나무 계단이 있었는데 거기서 갑자기 웬 아저씨가 튀어나오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꼬마야. 아저씨가 사탕 줄게. 재밌는 거 할래? 아저씨랑 딸딸이 하러 갈래?"


아저씨가 내게 하자고 하는 재밌다는 것, 그 말의 뜻을 나는 전혀 몰랐다. 다만 모르는 사람이 사탕 주겠다고 할 때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절대 따라가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그렇게 배운 걸 기억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얼어붙어서 눈알만 굴리며 주변을 살피는 사이 아저씨는 아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슬슬 다가왔다. 그리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려고 하는데 그 순간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냅다 뛰었다. 혹시라도 아저씨가 나를 잡으러 따라올까 봐 죽을힘을 다해서. 다행스럽게도 코너를 한 번만 돌면 약국이 있었기에 뒤도 보지 않고 부리나케 약국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손님 하나 없던 텅 빈 약국 문에 부딪칠세라 온몸을 던지면서 열고 들어가 곧 죽겠다는 듯이 숨을 헐떡이는 나를 보며 약사님은 놀라서 뛰어나오셨다.


"얘 무슨 일이야. 괜찮니?"


약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기하는 의자에 거의 기절하다시피 누운 내게 약사님은 얼른 물 한잔을 떠다가 천천히 먹여주셨다. 내가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야 다시 물으셨다. 뭐 때문에 그렇게 뛰어들어온 거냐고.


"약국을 오는데 어떤 아저씨가요. 갑자기 나타나서 저한테 재미있는 거 하자고 했어요. 모르는 아저씬데 무서워서 그냥 막 도망쳤어요."


나보다 더 놀란 듯한 약사님은 집이 어딘지, 집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는지 물으셨지만 내가 번호를 외우지 못했던 터라 심부름의 목적이었던 약을 챙겨주시고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하셨다. 그 사이 물도 간식도 챙겨주신 약사님 덕분에 마음이 빠르게 진정됐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선생님. 저 이제 집에 갈게요.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저 안 와서 걱정할 것 같아요."

약사님께 말씀드렸더니 배웅까지 나와주셔서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시장을 통하는 길 말고 큰길로 돌아가라고 당부하며 인사해 주셨다. 조금 걸어가다 뒤돌아보니 약사님은 계속 나를 보고 계셨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니 안심이 된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같은 아저씬데 다르다. 아까 그 아저씨는 무서운 아저씨고 약국 선생님은 좋은 아저씨네.'


나는 그렇게 무서운 경험을 하고도 집으로 돌아가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그 기억은 마치 키보드의 삭제 버튼이라도 누른 듯 쉽게 지워졌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중학생의 내가 학교 가는 길에 나타나는 바바리 변태를 마주치며 잊고 있던 그 단어와도 다시 마주하게 됐다. 그날의 기억이 소름 돋게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아저씨가 내게 하자고 했던 재밌는 것. 그것은 일종의 성행위였다. 그 사건이 있었던 날보다 그 단어의 뜻을 알게 된 날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내게, 서있던 자신의 반도 안 되던 작은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고작 사탕 하나에 넘어가고도 남을 나이의 여자아이에게 남자어른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려고 했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 처음으로 글로 쓰면서도 무서운 공기가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런 일을 겪고도 트라우마가 남은 것 같진 않다는 사실. 무서운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감싸는 따뜻함이 더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일까.



이후로 한 번씩 약국에 갈 때면, 그날의 약사님과 비슷한 연령대의 약사님을 볼 때면 생각해 본다. 내가 그날 좋은 어른이 아닌 나쁜 어른의 기운에 끌려갔다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일이라고. 일곱 살 앞의 생이 어찌 됐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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