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할 나위 없는 한 그릇
혼자 어디 여행을 할 때 계획이란 걸 세우지 않는 편이지만 후쿠오카 여행 때는 어느 때보다 특히 그랬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꼭 한 군데는 가야겠다 생각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국내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일본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갔던 우동집 '미야케 우동'이었다.
한 여름에 하카타로 출장을 간 고로상이 먹은 몇 가지 음식 중에서도 아주 심플한 우동이 당긴 것은 운명이었을까. 우동집은 운영시간이 짧은 데다 재료소진이 되면 조기마감의 가능성도 있었기에 찾아가는 시간이 애매했는데 내가 묵는 숙소와 아주 가까워서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도 금방 갈 수 있었다. 여행 중에는 내가 원하는 목적지가 가까운 것만 해도 굉장한 행운.
나는 그 행운을 놓치지 않으려 우동집을 향하여 파워워킹을 했다. 이미 오픈 시간은 지났지만 점심시간 직전이니 빨리 도착만 하면 대기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뭐, 대기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속으로 약간의 내려놓음을 시전 하며 걷다 보니 금세 우동집 앞에 도착했다. 입구의 하얗고 동그란 등롱이 드라마 속 고로상이 보던 그대로였다.
세월이 빤히 보이는 듯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혼자 온 현지인들이 각각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방에서는 우동을 끓여내는 분과 홀 담당을 해주시는 분이 바빠 보였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혼자 들어선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두 분 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자리 안내를 받은 나는 준비된 멘트로 주문했다.
"에비텐 우돈 히토츠 쿠다사이."
그런데 홀 담당 어르신이 갑자기 "파?" 하시는데 당황한 나머지 "네?"라고 되물었다.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다시 한번 "파?" 하시는데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아~ 하이.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이건 대체 무슨 대화법인지.
고로상이 출장을 가서 우동을 먹었을 때만 해도 파 토핑은 셀프로 넣게끔 준비되어 있었는데. 만국 공통 고물가 시대구나. 오랜만의 일본 여행을 하며 새삼 현실을 체감했다.
아무튼 우동은 빠르게 나왔다.
미야케 우동을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종합했을 때 퍼진 면이라 식감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 라면도 꼬들면보다는 퍼진면을 좋아하고 우유에 말은 콘푸라이트도 바삭한 상태로 씹어먹는 것보다는 우유에 폭싹 젖어 눅눅해진 것을 좋아하는 사람 아니던가. 나는 그 이질감만큼은 괜찮을 거라 확신했다.
내 앞에 있는 우동의 굵디 굵은 면발은 육안으로는 퍼짐을 가늠하기는 힘들었다. 퍼진 면도 먹어봐야 알 일이지. 나는 얼른 사진 몇 장을 찍어놓고 우동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 <MIU404>에서 경시청 기동수사대의 4 기수는 근무 중간에 직접 만든 우동으로 다 같이 식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중 후쿠오카 우동에 관해 우동 덕후인 진바 반장과 후쿠오카 우동을 만든 막내 코코노에의 대화 내용.
"후쿠오카 우동은 탄력이 없다고."
"그렇지 않아요. 쫄깃해요."
그렇다. 나는 두 사람의 짧은 대화 내용을 후쿠오카에서 70년의 세월을 지킨 우동집에서 그대로 느낀 것이다.
식감은 퍼졌다기보다는 부드러웠다. 면발의 굵기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부드러워 뚝 끊기긴 하지만 씹어보면 쫄깃 탱탱했고, 육수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듯 맑게만 보이는데 깊은 맛을 냈다. 게다가 그 육수 맛이 스며든 새우튀김의 짭조름함과 젓가락을 이용해 흩어지는 토핑 연출이라도 하라는 듯한 눅눅함. 호불호가 엄청 갈리지만 개인적으로는 극호였다.
그 옛날 "국물이 끝내줘요." 광고처럼 한 그릇 후루룩 뚝딱 하고 나니 시원한 물부터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조금 고민이 됐다. 퍼진 식감이 별로라는 후기와 동급으로 위생 문제에 대해서 예민한 사람들은 절대 가지 말라는 후기도 많았는데 실로 몇십 년은 됐을 것 같은 오래된 정수기에 앉은 먼지와 깨끗해 보이지 않는 컵이 비위 강한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짠 기운은 얼른 내려야 했다. 그냥 마셔버리면 물이지 싶어서 물을 한 컵 가득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그런데 또 웬걸? 얼음물 효과라도 넣은 것 같은 미칠 듯 시원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민망했다. 로컬 맛집은 오래된 집, 오래된 집은 깨끗하지 않은 집이라는 판단으로 기피하는 사람들을 보며 '사람 사는 집도 다 똑같을 텐데.' 생각하던 내가 고민했던 것이. 먼지는 우리 집 정수기에도 앉아 있는데 얼룩은 우리 집 컵에도 있는데 왜 고민을 한 건지. 나는 시원한 물을 한 컵 더 마시고 두 분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장사란 쉽지 않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음에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는 이 우동집에 존경심을 담아.
솔직히 오사카 음식 맛에 길들여진 나는 후쿠오카 음식이 그렇게까지 맛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매 끼니를 먹을 때마다 마시는 생맥주가 제일 맛있었다. 그런데 이 우동집에서는 후쿠오카 여행 중 유일하게 술을 곁들이지 않은 식사시간을 보냈다. 술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기도 했지만 술을 찾을 이유도 없었기 때문. 그 정도로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한 그릇을 맛 보여준 곳이었다.
나는 다음에 후쿠오카를 또 가게 된다면 목에 남은 짠맛을 내려줄 시원한 맥주가 없더라도 시원한 물은 있는 이 우동집을 다시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