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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기 Jul 27. 2019

이런 날

부끄러운 한 주를 보낸 이야기

주말에 일을 했으니 월요일엔 쉬어야지 하고 생각했다가, 그냥 출근하기로 했다. 혼자 ‘잘’ 쉴 계획을 세우다가 만사가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 걸어서 출근을 하다가 청과 시장에서 제대로 넘어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련한 자세로 인도에 엎드려 있었다. “학생, 괜찮아?” 몇몇 상인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걱정을 해주셔서, 나는 벌떡 일어나 기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참 걸어와 몸을 살펴보니 종아리가 조금 긁혔고 왼쪽 손이 쓰라렸는데, 지금은 멀쩡하다.


오후 세 시. 어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다. 노트북 화면에는 수정해야 할 작업 파일 창을 두어 시간 째 띄워만 두고, 작업대 위에는 바지감 스와치들을 두 줄로 길게 펼쳐 놓고 째려만 보고 있다. 모처럼 좋아하는 간식인 게살 맛 어묵도 먹었는데. 스스로에게 약간의 배신감이 느껴졌다.


하루를 온전히 혼자 보내는 것은 정말 편하지만, 자극이 없는 날들이 길어지면 종종 무료한 날이 와버린다. 아무것도 마음에 닿지 않는 것이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끌어안고 신나는 밴드 음악을 따라 부르며 몸을 흔들기도 하고, 베란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늙은 개처럼 멍하니 창 밖을 구경하기도 해 본다. 오늘은 어제보다 화창한 좋은 날씨지만, 모든 게 버석한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재미없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차가운 방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귀찮아도 몸과 마음이 기뻐할 만한 일을 해야만 한다.


따끈하게 반신욕을 할 수 있는 데에서 하루 자고 올까. 단정한 냄새가 나는 하얀 시트 위에서 뒹굴거리면서 책도 읽고 자몽티도 천천히 마시는 거지. 아니면 아직 중고 서점에 풀리지 않은 그 책을 사서 조용한 카페에 다녀올까. 정신이 확 들 정도로 진하고 달콤한 말차 라떼를 시원하게 들이켜는 거야. 놀이동산에 가서 설레는 기운을 얻어올까. 아, 여름방학이라 학생들이 엄청 많겠구나. 게다가 나에게 매월 이맘 때는 통장 잔고가 훅훅 줄어드는 시기다. 가성비가 좋은 방법으로 치킨을 시켜 먹는 방법이 있지만, 이날 따라 입맛도 없었다. 경험상 기분 전환용 치킨은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효과가 있다.


몸을 일으켜 간단히 다리를 풀어준 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도 가까이에는 항상 강이 있다.


뛰기 전에는 무릎에 대한 오빠의 조언을 떠올리고, 뛰기 시작할 때에는 평생 마라톤을 해 온 듯한 할아버지들의 가벼운 몸동작을 생각한다. 뛸 때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난다. 호흡과 땀, 자꾸 빠지는 이어폰에만 집중한다. 아직 5킬로는 버겁고 3킬로가 적당한데, 호흡이 엉망인 날은 얼굴이 더 빨개진다. 돌아와 씻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화요일 오전. 마음을 두드려 줄 것을 보러 가자. 헐렁한 검은색 원피스를 걸치고 감지 않은 머리를 둘둘 묶은 채 삼청동으로 향했다. 기운이 없으니 소규모의 전시 두 개를 둘러보고, 조용한 카페에 가서 책을 읽다가 올 것이다.


나는 삼청동을 잘 모른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있고, 곳곳에 모자 공방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안다. 전시장으로 가는 길. 골목골목 임대 문의 종이가 붙어 있는 빈 상가들이 많아진듯했다. 파스텔 톤의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어른들과 신이 난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날이 조금 더 시원했으면 좋았을 텐데.


첫 번째로 들린 곳은 ‘바라캇 서울’에서 전시 중인 <여림의 미학:19세기 유럽 명품 유리기> 전이었다. 화려한 장식 속 매끈하게 빛을 머금은 유리기의 소재감이 매력적이었다. ‘예술품과 실용품의 경계’라는 설명이 마음에 남았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은 ‘초이 앤 라거’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매튜 스톤: samll awakenings, 작은 깨달음들> 전이었다. 캔버스를 채우는 붓 자국들은 마치 근육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달콤하고 가벼운 색상들로 흘러내리는 천의 표현이 생생했다.



같은 골목을 여러 번 돌아 전에 독서 모임을 했던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추천받은 오미자 차를 주문하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작은 노트에 짧은 감상을 적고 생각했다. ‘힌트를 얻으러 왔다가 숙제를 안고 가는구나.’ 시원한 오미자차로 목을 축이고, 가져간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수요일. 평소와 같이 작업실에 나가 꼭 보내야 할 서류만 전송하고 퇴근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누군가를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몇 안 되는 소중한 인연들에게는 힘나는 이야기만 하고 싶어 그만두었다.


목요일. 하루 종일 잠을 잤다. 나는 어린 개처럼 하루 종일 잘 수 있다. 꿈속에서 작업실 벽을 검은색으로 칠했고, 학창 시절의 강당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다리가 잘린 소녀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중간중간 잠에서 깨었을 때는 밥을 먹거나 억지로 눈물을 쥐어 짤 영화를 조금씩 보았다. 아팠던 말을 억지로 끄집어내 엉엉 울기도 했지만, 영화가 끝나면서 멀쩡해졌다. 부모님 전화에 몸살이 났다고 거짓말을 했으나, 엄마 아빠는 힘이 나는 말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금요일. 비 오는 날 아침. 눈을 뜨자 노래가 듣고 싶었다. 선우정아의 <비 온다>를 틀어 놓고 샤워를 했다. 그러다 부모님이 보낸 택배를 발견했고, 택배를 들이기 위해 집을 치우고 냉장고를 비웠다. 다시 오후 내내 잠을 자다가 늦은 저녁에 깨었는데, 즐거운 마음이 차오른 것이 느껴졌다.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왔다. 꼭 며칠이 휙 하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균형을 잃었을 때는 빈 페이지를 연다. 아무 노트나 펼쳐 균형을 깨뜨린 것을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꽤나 잔인했지만 정신이 들었다. 나는 오랜만에, 단순히 겁을 먹었던 것이다.



토요일. 간단히 점심을 챙겨 먹고 작업실에 나왔다. 걸어오는 길에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지나쳤고, 몸을 녹여 일하는 가족과 지인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어리광쟁이인지, 이렇게 숨을 수 있는 여유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 등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스스로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 주었다.


약한 모습을 드러내면 심술궂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는 점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지만, 늘 아무렇지 않았으므로 괜찮다. 오후에는 이 부끄러운 반성문을 마무리해 올리고 작업 파일 하나를 수정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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