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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09. 2020

연방파와 공화파의 경제 이념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17

연방파와 공화파


독립전쟁 이후 미국의 정치는 해밀턴 파와 제퍼슨 파로 구분되어 대통령 및 의회의 승인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해밀턴은 *연방파(Federalist Party)로서 각 주의 독립적인 권한의 강화보다는, 연방정부의 중앙적인 권한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지층은 미국 상공업이 발달한 뉴욕을  중심으로 한 북동부의 상인계층이었다. 


이들은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한 상공인들로 제조업 육성을 위해 관세를 높여 외국의 물품 수입을 일정 부분 규제해야 한다는 편이었고, 은행 중심의 채권자 입장을 대변했다.


이와는 반대로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미국 제3대 대통령)의 공화파(Democratic Republican Party)는 연방정부보다는 각 주의 권한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고, 남부의 농업인들이 주요 지지층이었다. 


국무장관 시절의 제퍼슨  <출처 : 위키피디아> 


농업이 주력 산업인 버지니아 출신의 제퍼슨은 농민들의 입장을 강하게 대변했고, 원활한 농산물의 수출을 위해 관세를 낮춰 자유무역을 활성화하자는 편이었다. 


당시 미국은 땅이 넓어 농업 위주의 경제 체체를 갖추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국가의 주요 수출 품목(담배, 목화 등) 대부분을 담당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은행 대출이 많아 불경기나 비수기에 채무 상환 압박에 시달렸고, 이에 따른 불만이 높았다. 이들(공화파)은 채무자의 입장을 대변했다.


두 파는 주요 정책이 의회에 제시될 때마다 정쟁을 벌였다. 가장 극단적으로 충돌한 것은 ‘제1 미국은행’인 중앙은행 설립에 관한 안건이다. 


중앙은행을 둘러싼 정치적 대결


이들은 중앙은행에 대한 생각이 서로 상이했다. 


해밀턴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국부론에서 설명한 잉글랜드 은행의 사례를 벤치마킹 해 미국에도 중앙은행을 세워 지폐를 발행, 자본을 활성화 하자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제퍼슨은 지폐의 발행을 우려하여 반대를 했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출처 : 위키피디아>


제퍼슨은 과거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여 1800년에 발생된 프랑스 존 로의 '남해 버블' 사기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지폐 발행의 위험성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주장,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더구나 중앙은행이 정부가 아닌 민간인들(특히 은행가)에 의해 운영한다는 것에 더더욱 경악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고, 정부의 은행 역할을 민간인이 대신해 결과적으로 연방정부의 권한이 축소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설립을 결사반대했다.


이런 상황에 중앙은행 설립 건은 최대의 정치적 이슈였고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의회에 있었고, 승인을 거쳐 결정된 사항에 워싱턴 대통령이 최종 서명함으로써 중앙은행 설립이 확정 됐다. 1791년 2월에 ‘제1 미국은행’이 설립됐다.


제퍼슨이 중앙은행을 반대한 이유는 정치적 목적 외에 미국 특유의 은행제도에 원인이 있었다.



미국의 은행 제도


당시 미국의 은행제도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독특했다. 지역을 기반으로 수많은 지역은행이 서로 경쟁하는 구조였는데, 원인은 정치적 타협에 의한 결과 였다. 


독립전쟁 당시 상인 및 정치인들은 농민의 힘을 빌려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독립 이후에 보상을 위해 농민들의 권익을 지켜줘야 했다. 독립 후 농민은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요구사항을 전달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지역 은행이었다.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전국 규모의 은행은 상인이나 정치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지역에 기반을 둔 은행만이 농민을 위한 정책을 수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이 때문에 미국만의 독특한 지역 은행 구조가 생겨난 것이다.


 '주법은행(state bank)'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중앙은행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주의 은행이 자신의 주에서 활동하는 것을 철저하게 제한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주 안에서도 구역을 나누어 특정 지역 내에서만 은행 면허를 발급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은행(주법은행)은 태생적으로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고 타 지역의 교환어음(환어음)이 도래하면 거래 확인이 복잡하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낭비 요소가 생겨 날 수밖에 없었다. 


아을러 주법은행들이 제각기 지폐를 발행하여 종류를 구별할 수 있는 별도의 책자가 발행되었다.


1932년 뉴욕시 뱅크런(Bank Run)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단점들은 금융공황이 발생되면 잦은 은행의 파산으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런 지역적 특수성을 보완하기 위해 주법은행을 관리, 감독할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것이 해밀턴이 가진 생각이었다. 

    

* 미국은 초창기 연방정부의 권한 확대를 둘러싸고 이를 추진하던 해밀턴 중심의 연방주의자들(Federalist Party)과 이에 반대하는 제퍼슨과 매디슨 중심의 공화주의자들(Democratic Republican Party)이 대립했다. 민주공화당의 제임스 먼로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연방주의당이 소멸하고 민주 공화당이 단일 정당이 되지만 1824년 선거 이후 당이 분리되어 존 권시 애덤스의 국가 공화당과 앤드류 잭슨을 지지하는 민주당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국가 공화당은 휘그당을 거쳐 1854년 링컨에 의해 공화당으로 변경된다. 이로써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 체제가 성립되었다. (출처 : 유재수, 2013년, 삼성경제연구소,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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