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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08. 2020

알렉산더 해밀턴의 죽음과 애런 버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16

해밀턴은 1795년 재무장관에서 물러난 후에도 연방파 편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해밀턴과 연방파


1798년 프랑스와 미국의 갈등 이후 서서히 분열의 조짐이 보이던 연방파 내 해밀턴과 존 애덤스의 갈등은 결국 폭발했다(연방파와 공화파에 관한 내용은 다음 장 참조)


해밀턴은 1800년에 진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연방파의 대선주자였던 존 애덤스(John Adams, 1735~1826, 미국의 제2대 대통령)를 멀리하고 타 후보를 지지하는 행동을 했다.


결국 두 사람의 정치적 갈등은 연방파의 분열을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존 애덤스의 재선은 실패했다.



존 애덤스(John Adams)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연방파의 반대인 공화파 토마스 제퍼슨과 연방파의 에런 버(Aaron Burr, 1756~1836)가 최다 선거인단 득표를 얻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대통령을 선택하는 것은 하원(당시 연방파가 다수당이었음)에서 결정짓게 되었다.


세상이 다 알 듯 해밀턴과 제퍼슨은 서로 간의 견원지간이었다. 애런 버는 당연히 해밀턴이 자신을 선택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해밀턴은 제퍼슨을 미워하는 연방파 의원들을 설득, 오히려 제퍼슨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제퍼슨의 대통령 취임과 애런 버의 결별


결과적으로 제퍼슨이 제3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고, 버는 부통령으로 남게 다(당시 대통령 제도는 러닝메이트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으로, 투표를 통해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을 맡게 되는 시대였다. 동률인 경우, 의회에 그 선택권이 주어졌다)


이 선택으로 연방파 내 반발이 이어졌고, 해밀턴은 실질적 지도자의 권위를 상실하면서 정치적 활동이 끝나게 됐다.


그가 정적인 제퍼슨을 선택한 이유는, 애런 버의 자질이 너무도 탐욕적이고 사리사욕이 많아 절대 대통령으로 올라서는 안된다는 개인적인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버는 이러한 해밀턴의 모습에 배신감을 느꼈고 결국 그와 결별한 뒤 정치적 대척점에 서게 다.


해밀턴과 애런 버, 1790년 뉴욕 월스트리트  <출처 : 위키피디아>


이전에 애런 버는 1799년 뉴욕에 은행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이복동생을 이용하여 상수도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뉴욕의 상수도 환경은 열악하여 언제나 물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에 상수도 회사 설립에 대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여기에는 해밀턴도 찬성을 했다.


하지만 회사 정관을 제출하는 날, 버는 아무도 모르게 정관 문구 하나를 추가함으로써 회사가 상수도가 아닌 은행업을 할 수 있는 회사로 변신시켰다.


이 회사의 이름은 ‘맨해튼 상수도 회사(Manhattan Company)’였고 사업을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업을 본업으로 전환했다.


상수도에 관심이 없던 이 회사는 열악한 상수도 공급망을 설치했으나 깨끗한 물 공급에는 소홀하여 용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높았다. 대신 금융업을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으로 회사의 주주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그중 한 명이 애런 버였다.


주식 가격도 크게 올라 주가조작 등으로 버가 벌어들인 수익은 상당했다. 결국 상수도 사업은 포기하고 은행업에 집중하게 됐다(나중에 '체이스 맨해튼 은행(The Chase Manhattan Bank)'으로 이름을 바꾸며, 2008년 금융위기를 거쳐 J.P. 모건 은행과 흡수 합병한다).


해밀턴은 불합리한 사업 운영과 개인적 욕망을 우선시하는 버를 싫어하게 됐다. 심지어 이런 행동을 ‘버의 사기 작품’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해밀턴과 버의 권총 대결  <출처 : 위키피디아>


버와 권총 대결, 그리고 해밀턴의 죽음


버는 1804년 뉴욕주 주지사 선거에서 떨어졌는데, 해밀턴의 비난(버는 사기꾼이다)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1804년 6월 어느 날, 버는 파티장에서 본인에게 모욕을 준 해밀턴을 상대로 권총 대결을 신청하고, 이 해 7월 11일 뉴저지 주 허드슨 강가에서 결투가 벌어졌다.


해밀턴은 3년 전 그의 장남이 권총 대결로 목숨을 잃은 과거가 있어 끝까지 결투를 망설였으나,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로 했다. 결국 대결에서 치명상을 입은 해밀턴은 극심한 고통 속을 헤매다가 다음 날 사망했다.


맨해튼의 트리니티 교회에 있는 알렉산더 해밀턴 묘지  <출처 : 위키피디아>


버는 살인죄로 기소되고 반역자로 재판을 받기도 했으며,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결국 평생을 도망자 신세로 쫓기다 1836년 사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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