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엽 May 07. 2020

최초의 경제 위기 : 1792년 공황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15

1790년 미국 최초의 주식시장이 필라델피아에서 개장됐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독립전쟁 이후 미국의 수도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사실상 금융 중심지 역할도 담당하게 다.


필라델피아 거래소 설립


필라델피아 거래소 설립 이후 주식 투자 붐이 불었다. 연방정부 채권과 은행주 중심으로 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주식 투자는 지금과 같이 상장 회사의 정보가 공개되고, 재무수치가 발표되는 그러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아무런 정보 공개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로지 장기간에 걸친 사업 결과로 발생된 배당금이나, 소문과 근거가 약한 정보에 의지해 사고파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내부 정보 유출이 불법이 아닌 시절이었다).


사실상 작전세력과 한 패를 이뤄 내부 정보를 이용해 매매차익을 얻은 것이 가장 빠른 수익 증대의 지름길이었다.


필라델피아 휘장 < 출처 : 위키피디아>


1792년 공황(Panic of 1792)


1792년 미국 경제 최초로 공황이 발생했다. 일명 ‘1792의 공황(Panic of 1792)’으로 주식시장에서 거대한 작전세력이 발각된 것이다. 시장이 충격을 받았다.


공황의 주인공은 재무부 차관인 윌리엄 듀어(William Duer, 1743-1799)였다. 직위를 이용해 고급 정보를 이용하여 작전세력을 규합, 과도한 대출을 받아 주가 조작에 나선 전형적인 투기 사건이었다.


윌리엄 듀어는 1743년 서인도제도의 부유한 대농장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 이튼을 졸업한 수재였으며 해밀턴의 친척이었다.


해밀턴은 주식거래와 관련된 친구의 부탁도 매몰차게 거절할 만큼 청렴하였으나 듀어는 그렇지 않았다. 듀어는 독립전쟁 때 군납업자로 활동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채권과 땅 투기 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재무책임자로서 내부 정보를 통해 주식투기에 전념했고, 해밀턴과 친인척인 관계를 이용해 정부 관료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갔다.


해밀턴은 그에게 여러 번 경고를 보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는데 전념하는 인물이었다.


윌리엄 듀어(William Duer)  <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자신의 지위와 신용을 이용, 막대한 자금을 융자받아 루머를 퍼뜨려 은행주를 이용한 한탕주의를 추진하였다. 결국 무리한 욕심과 탐욕으로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고 파산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된 신용경색은 주가 폭락과 더불어 급격한 유동성 위기(돈의 부족)를 가져왔다. 자금을 융통하지 못한 25개의 증권 중개인들이 순식간에 파산했다.


증시의 패닉 현상이 은행의 예금 대량인출(Bank Run, 예금자들이 자신이 맡겨둔 예금을 찾기 위해 한꺼번에 은행으로 몰려드는 현상)로 옮겨졌다.


필라델피아 내 금융 신용도는 급속도로 경색되어 공황이 발생되었다. 문제는 공황이 실물 경제까지 옮겨가는 것을 막아야 다.


해밀턴의 해결과 뉴욕 월스트리트


경제공황으로 이어지기 전에 해밀턴이 나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요 채권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급 보증은 물론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여러 은행에 긴급 자금을 공급하였다. 아울러 일시에 대출금을 회수하지 않도록 은행측에 요청했다. 관세의 납부기간도 연기(45일)하여 자금의 흐름이 원활해지도록 지시했다.


넘치는 유동성을 즉시 공급(돈의 공급)한 덕분에 주식시장과 은행은 회복되었다. 신용 시스템이 안정화를 찾으면서 금융 공황은 더 확대 되지 않은 채 한 달 만에 마무리됐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증시는 시장 참여자들로부터 신용도가 떨어지면서 공황 전에 비해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금융의 중심이 뉴욕으로 이동하여 발전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월스트리트가 있었다.


1797년 뉴욕의 모습 < 출처 : 위키피디아>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경제가 발전할수록 연관 회사의 주식 거래량 증가에 발맞춰 중개 업무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맞춰 주먹구구식 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체계적인 교통정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즉 특정 장소에서 증권 매매계약 체결을 하기 위한 장소와 규칙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일련의 증권 중개인들이 모여, 1792년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서 버튼우드 합의서(Buttonwood Agreement)를 작성했다.


이는 사실상 거래 수수료를 일정 금액으로 정하는 담합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이 문서를 계기로 뉴욕 증시의 공식적인 출범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받았다.


25년이 지난 1817년, 독립적인 건물을 갖춘 증권거래소가 ‘뉴욕 증권거래소’로 정식 출범하면서, 필라델피아 거래소는 그 지위와 명성을 서서히 잃어갔다.

이전 14화 해밀턴의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