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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채권⑭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참전

4. 제2차 세계대전 - 장병들의 총에 직접 총알을 넣어 주세요

by 한정엽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 국가들은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패전국인 독일을 압박했다.


독일의 배상금 규모를 풍자한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막대한 전쟁 배상금은 물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놓았다.


막대한 배상금에 휘청이는 독일


미국의 반대가 심했지만, 뼛속까지 독일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유럽 국가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독일 내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고통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나치즘이 성장하면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무리한 배상금 요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독일 지폐는 벽지로 사용될 정도로 가치가 떨어졌다 <출처 : 위키피디아>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고, 유럽 남부에서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전쟁을 일으킨 프랑코를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강대국의 신무기가 스페인 내에서 실험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중일전쟁이 발발, 일본군의 잔악한 난징대학살이 벌어졌다.


나치 정권으로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군사력을 증강한 뒤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자국에 강제 병합했다.


이후 이탈리아의 파시즘인 무솔리니와 손을 잡고 강철 동맹을 맺는 동시에 러시아와 불가침 조약을 맺어 유럽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대공황 당시 무료 급식소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은 대공황이 발생해 경제적인 빈곤함에 빠져 고생하고 있었다.


유럽의 전쟁 대비와 미국의 불황 탈출


독일의 전쟁 야욕이 드러나기 전, 유럽의 국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바탕으로 전쟁에 대비했다. 미국에서의 수입을 크게 늘려 대규모 군수물자를 준비해 놓았다.


이 영향으로 미국 경제는 대공황의 막바지 불황(1937~38)을 끝낼 수 있었고 군수품 생산으로 많은 기업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두 차례의 뉴딜 정책에서도 쉽게 해결되지 않던 실업률도 완전히 자리를 감췄다.


수많은 기업에서 인력을 모집하는 바람에 사람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상황 속에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약 6년여에 걸친 파괴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미국의 고립주의


1945년 9월에 종전을 하기까지 인류 역사상 또다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유럽의 국토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버렸다.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참전을 하지 않는 쪽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외국에 빌려준 차관과 군수장비 판매 대금을 못 받은 사례가 있었고 유럽의 일에 아예 관여하지 말자는 ‘고립주의(non-interventionism)’ 정책이 고개를 들고 나왔다.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는 현수막 <출처 : 위키피디아>


의회에서는 1935~37년 사이에 전쟁 교전국에 군수장비 제공을 금지하는 중립법(Neutrality Act)이 통과될 정도였다. 유럽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도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미국의 방관과 유럽의 고통


이후 1939년에 중립법의 수정 정책(Cash and carry)이 나왔지만, 현금을 통해서만 군수품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자산이 모두 바닥을 보인 유럽의 국가들이 현금을 주고 군수품을 사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재무장을 끝낸 독일의 전차 군단이 전격전(Blitzkrieg, 블리츠 크리크)을 통해 유럽의 강대국을 모두 쓸어버리는 상황이 지속됐다.



독일군의 전차 부대를 활용한 전격전 <출처 : 위키피디아>



이렇게 수수방관하다간 영국은 물론 러시아까지 독일의 히틀러 손에 넘어갈 판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무기대여법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은 심사숙고 끝에 한 가지 묘책을 마련했는데, 그것은 ‘무기대여 법(Lend And Lease Act)’이었다.


미국에서 군수품을 사들여 연합국에 빌려주는 방식으로, 국민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하나의 예로 이웃집 호스 대여를 설명했다.


‘불이 난 이웃집(유럽)에 호스(군수장비)를 빌려 주고 불이 꺼지면(전쟁이 종료되면) 호스는 다시 돌려받을 것’이라고 국민들을 설득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1941년 3월 의회에서 ‘무기대여 법’과 70억 달러의 예산이 승인되었다(전쟁 후 최종 집계된 금액은 약 503억 달러였다)


진주만 공습과 미국의 참전


이런 방관의 입장에 섰던 미국이 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습(Attack on Pearl Harbor)이었다.


일본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해 침몰시킨 것이다.



진주만 공습으로 파괴된 미 해군의 애리조나 호 <출처 : 위키피디아>


다음날 미국은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면서 유럽과 아시아 전쟁 지역에 막대한 군 병력과 전쟁 물자를 공급하게 되었다.


당연히 돈이 필요했고 다시 ‘전쟁 채권’이란 카드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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