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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Dec 27. 2021

대공황을 극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생애

대공황과 연관된 이야기 5

1929년 대공황은 뉴딜(New Deal)이라는 새로운 경제 정책으로 서서히 안정화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완전히 극복했다.  


이런 뉴딜 정책을 시행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1882년 1월에 미국 뉴욕 주 북부에 위치한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루스벨트가 태어난 집 <출처 : 위키피디아>



루스벨트의 탄생과 유복한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은 매우 유복했는데,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는 델라웨어&허드슨 철도(Delaware and Hudson Railway)의 부사장이었다.


참고로 루스벨트 가문은 18세기에 공화당을 지지하는 측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었는데, 이런 정치적 견해 차이에도 가문 사람들의 친교는 비교적 원활했다고 한다.



11살의 루스벨트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는 프랭클린과 사촌관계에 있는 친척이며, 그의 부인은 시어도어의 질녀인 엘리너 루스벨트(Anna Eleanor Roosevelt)였다.


그는 상당한 늦둥이였는데, 어머니의 나이 54세에 출생한 자식이었다. 당시 이복형제가 있었고, 심지어 조카보다도 3살이나 어렸다.


이 영향인지 어머니의 훈육은 매우 엄격했고 프랭클린은 어머니를 '가장 무서운 사람'으로 고백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유복했다. 정기적인 가족 유럽 여행은 물론 가정교사를 통해 귀족식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명문 사립고인 그로톤(Groton High School)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 역사학을 전공했고 이후 컬럼비아 로스쿨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정치계의 입문과 결혼 생활


변호사에 합격한 후 학교를 중퇴한 그는 월가의 유명 로펌에 취업하여 기업 관련 법률 업무를 담당했다.


1905년에는 당시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는데,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를 꺾고 이뤄냈다.



루스벨트 부부와 두 자녀 <출처 : 위키피디아>



결혼 후 따분하고 지루해하던 법률 업무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10년 뉴욕 주 상원의원이 되었고 실질적인 민주당의 진보적 리더 그룹에 속해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해군 차관보 시절의 남다른 노력


윌슨 대통령 시절에 1913년부터 19년까지 해군 차관보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해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는데, 해군력의 증강이야 말로 국가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하여 해군 발전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13년 해군 차관보 시절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해군에 속한 민간인의 노동 문제와 시스템 개선, 물류, 행정 문제 등의 개혁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 노력으로 해군에 속한 노조의 지도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재임 시 7년 동안 단 한 번의 파업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1920년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인 제임스 콕스(James Middleton Cox)의 러닝메이트 자격으로 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정권 획득에는 실패했다.



제임스 콕스와 함께 한 루스벨트(왼쪽) <출처 : 위키피디아>


육체적 불행과 좌절, 그리고 재기


이후 1921년에 캄포 벨로의 여름 별장에서 찬물에 빠진 후 몸에 이상 증상이 발생했다. 얼마 후 충격적인 '소아마비 진단'을 받게 된 그는 걷지 못하는 하반신 마비와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게 됐다.


힘들게 지팡이에 의지하는 연습부터 엉덩이와 다리를 잇는 철 교정기의 착용 연습까지, 모든 것이 그를 힘들게 했다.


이 때문에 심각하게 정계은퇴까지 고려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게 된다.


재기에 대한 굳은 신념은 1929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모두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1930년 뉴욕 주지사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뉴욕 주지사 시절의 활발한 활동


주지사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불어 닥친 대공황으로 모든 것이 혼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노인연금제도의 확립과 급격하게 경제권이 추락한 농민을 비롯한 실업자 구제 등 여러 가지 혁신적인 개혁을 진행하여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그의 주지사 재임 중, ‘역대 최고의 뉴욕 주지사'라는 칭송이 따라붙으며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어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 허버트 후버 현 대통령을 누르고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32년 대통령 선거 결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대통령 당선과 '뉴딜' 정책의 시행


그의 앞에 놓인 수많은 경제적 어려움의 해결은 '뉴딜(New Deal)' 정책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이들의 자립을 위한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포괄적인 사회개혁도 포함시켜 전반적인 사회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그의 재임 중 발생된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편에 서서 나치의 독일과 파시즘의 이탈리아, 아시아의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를 이끌어 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를 위해 초유의 ‘4선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12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그는 63세이던 1945년 4월, 급작스런 뇌출혈로 사망했는데, 그의 사후 한 달 뒤인 5월에 독일이 항복했고 유럽의 전쟁이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나고 그의 희망대로 세계 평화를 위한 조직인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이 창설되었다.


그는 '뉴딜'을 통해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을 이끌어간 사람으로 유명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았다.



1941년 대서양 헌장 회의 때 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처칠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보수주의 측면에서 사람들의 인기에 편중한 ‘길거리 정치’라는 표현을 받기도 했고, 기업에 대한 과도한 간섭과 제한으로 민주주의에 역행했다는 평이었다.


그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


하지만 반대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에서 '평등'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적절하게 사용되었던 시기가 없었다는 평도 있었다.


특히 과거에 없던 복지 정책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음으로써 과도한 기업의 영향력을 제어함은 물론 인권 향상에도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제조업에 고용된 숫자가 크게 증가, 이들의 경제력 향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고 ‘인종 및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법을 발동하여 미국 최초의 고용차별에 반대하는 프로그램을 시행시켰다.



사회보장법에 서명하는 루스벨트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전기 작가인 제임스 번스(James M. Burns)는 ‘루스벨트의 정책적 결정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실용주의에 의해 더 많이 결정되었다’라고 평했다.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의 시행을 묻는 질문에 대해 ‘방법을 정했으면 이를 실행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만약 실패하면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언가 새로 시행해 보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장례식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미국의 대공황을 극복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뉴딜을 통해 노동자의 인권 개선과 정부 중심의 복지 정책을 확립한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 인기 순위를 조사하면, 언제나 순위 3위 안에 들 정도로 지금도 높은 인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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