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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12. 2024

미국 정계를 흔든 '키팅 파이브' 스캔들

저축대부조합 파산 사건 06

윌리엄 블랙의 저서


윌리엄 블랙(William K. Black)은 미국의 변호사이자 학자이다. 은행 규제 기관의 주요 임원을 역임한 경력을 갖고 있다.


윌리엄 블랙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1984년부터 86년까지 '연방주택대출 은행위원회(FHLBB, Federal Home Loan Bank Board)'의 소송 이사를 담당했고, 1987년 에는 '연방저축및대출보험공사(FSLIC, Federal Savings and Loan Insurance Corporation)'의 부국장을 지냈다.


특히 주택대부조합의 금융 대출과 관련된 수많은 소송 사건을 다루었는데, 그가 맡아서 진행한 과정을 하나의 책으로 저술했다.


제목이 <<은행을 강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은행을 소유하는 것(The Best Way to Rob a Bank is to Own One)>>이었다.


사리사욕을 챙긴 은행가들


그는 이 책에서 저축대부조합의 무리한 대출과 이를 통해 사리사욕을 챙긴 은행가들을 비판했다.



은행을 강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은행을 소유하는 것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정부 규제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은행의 이익을 위해 과도한 대출로 발생된 금융위기가 사실상 '금융가들의 탐욕을 위한 파괴적인 사기 행위'라고 주장했다.


한 개인이 자신이 소유한 은행을 이용해 타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물론 이익을 얻기 위해 무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을 막아야 한다고 적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했다.


연방정부의 독립적인 규제 기관이 은행을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기능을 만들어야만 사전 예방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개인의 사리사욕이 남긴 모럴해저드


시장의 자율성과 금융회사 경영진의 올바른 사업 의지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저축대부조합의 대규모 부도 사태와 같은 금융위기가 반복된다고 하였다.



연방주택대출 은행위원회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상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제도적 장치 마련을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교훈에도 금융 위기는 반복적으로 발생되었고, 자신의 탐욕을 위해 수많은 이들에게 고통과 눈물을 안겨준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이런 잘못된 점을 감추고 불법적 사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권에 돈을 주고 영향력을 행사는 일도 발생했다. 한마디로 합법을 가장한 사기 행위에 정치적인 방어막을 갖춘 것이다.  


'키팅파이브(Keating Five)' 스캔들의 시작


이런 사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일명 '키팅 파이브(Keating Five)'라 불린 키팅 스캔들이었다.



찰스 키팅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사건의 주인공인 찰스 키팅(Charles Keating)은 금수저이자 명망 있는 사업가로 스포츠 스타 출신이었다.


그는 1940년대 신시내티 대학 대표로 전국 수영대회에 출전, 우승을 거머쥔 챔피언 출신의 영웅이었고 해군에서 군 복무를 4년간 마친 사람이었다.


수영계 발전을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침여한 것은 물론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서 반포르노 운동에 참여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테레사 수녀가 진행하는 봉사활동에 많은 돈을 기부도 했다.


이런 그는 사업가인 칼 린드너(Carl Lindner)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그의 화려한 경력이 시작됐다.


동업을 시작한 칠스 키팅


당시 린드너는 몇 가지 체인사업과 부동산 개발, 저축대부조합을 거느리고 있었다. 린드너의 다양한 사업 영향력에 반한 키팅은 그와 동업을 하게 된다.  



칼 린드너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960년에 린드너의 회사를 연결한 '아메리칸 파이낸셜 그룹(American Financial Corporation, 이하 AFC)'를 설립했다. 잡다하게 분산된 린드너의 사업체를 하나로 모아 이들을 통솔하는 모회사로 AFC를 만든 것이다.


린드너는 키팅을 부사장으로 임명한 뒤 그의 전국적인 지명도를 십분 활용하여 대규모 대출을 시행했고, 이 영향으로 지역 내 재력가들이 모여들면서 AFC의 사업 규모는 급속도로 커져 갔다.


그렇지만 AFC는 자회사 간에 복잡한 내부거래가 너무 많았고, 오직 이익을 위한 무차별적인 대출 시행 등으로 덩치만 커지면서 회사의 재정은 날로 어려워졌다. 사실상 통제가 안 된 것이다.  


늘어나는 손실과 투자자들의 집단 소송


결국 지저분하게 얽힌 사업 모델은 탈이 나기 시작했고, 손실을 본 투자자들의 항의와 고소로 소송전이 벌어졌다.


현 아메리칸 파이낸셜 그룹 본사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경고를 받은 AFC는 결국 린드너와 키팅이 배임과 횡령 혐의로 고발을 당하자 둘의 사이가 멀어졌다.


키팅은 한발 물러나 향후 법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쓰고 법정 구속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AFC를 퇴사한 키팅은 그동안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지명도를 활용, 1976년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주택건설업체인 ACH(American Continental Homes)를 인수했다.


본격적인 자기 사업에 나선 키팅


이후 상호를 ACC(American Continental Corporation)로 바꾼 뒤 사업을 크게 키워 짭짤한 수익을 거두었다. 1984년 5천만 달러를 들여 적자에 허덕이던 링컨 저축대부조합(Lincoln Savings and Loan Association)을 인수했다.



링컨 저축대부조합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린드너에게 배운 방식대로 지주회사를 세운 키팅은 1984년 불어온 저축대부조합의 규제 완화에 힘입어 고객들 예금으로 고수익 자산(부동산 및 정크 본드)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시기가 좋아서일까? 4 년여 만에 자산이 5배 규모로 크게 늘어났는데, 11억 달러에서 55억 달러로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위험성이 너무 컸다.


잠재적 부실이 많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고객들에게 자신의 회사인 ACC의 고위험 채권을 대량으로 팔았다.


부실 채권의 대량 판매와 부도덕한 사업 방향


이는 대규모 건설계획을 앞세워 흥행몰이에 나선 것이지만,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다. 키팅을 믿은 고객들은 이자율이 높다는 이유로 많은 양의 채권을 사들였다.



미국의 일반적 주택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얼마 후 부동산 경기가 하락하면서 사실상 부실채권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채권 가치가 폭락했다.  


결국 1889년  ACC가 도로 무너지면서 자그마치 2만 3,000명의 투자자들이 2억 5,0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사실상 금융권을 내세운 합법적 사기였다.


그동안 링컨 대부조합을 시작으로 키팅의 회사는 요리조리 감독 기관의 법망을 잘 피해왔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숨어 있었다.


정치권의 도움과 언론에 드러난 추악한 사실


키팅의 사기성 범죄가 드러나면서 언론에 공개된 것이, 키팅에게 정치 자금을 받은 5명의 상원의원이었고 그 금액은 약 130만 달러였다.



찰스 키팅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들은 키팅에게 감독기관의 제재를 피할 수 있는 유리한 방법을 조언했다.


이들을 가리켜 일명 '키팅 파이브(Keating Five)'라 불렀는데, 민주당 상원의원 4명과 공화당 상원의원 1명이었다.


일명 정치후원금 스캔들이었다. 정치인은 민주당의 앨런 크랜스턴, 데니스 데 콘치니, 존 글렌, 도날드 W 리글 주니어와 공화당의 존 매케인이었다.


정체가 폭로된 키팅파이브


특히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는 유명한 베트남 전쟁영웅이자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와 겨루었던 쟁쟁한 정치계의 거물이었다. 매케인은 이 사건으로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이들은 상원 윤리위원회의 자체 조사를 받았고 그 기간은 2년여 에 걸쳐 진행되었다.



정치인 존 매케인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감옥에 가지는 않았다.


대신 키팅은 캘리포니아 주에서 42건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92년 4월에 캘리포니아 고등법원 판사인 랜스 이토(Lance Ito)는 우디 거스리의 말을 인용해 "총보다 만년필로 고통받는 사람이 더 많다"라고 키팅에게 최고 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키팅은 파산을 이유로 벌금(1억 2,200만 달러)의 기준도 낮추었고 항소를 통해 형량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키팅의 재판 결과와 그의 인생


키팅은 4년 6개월여의 감방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뒤, 자신은 정치적 모함에 걸려 희생당한 사람이라고 항변했다. 부동산이 오르면 모든 부채를 상환할 수 있었는데, 그전에 자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썼다는 논리였다.



찰스 키팅을 다룬 책인 <<저를 믿으세요, 찰스 키팅과 사라진 수십억 >>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사업을 이어갔다. 2008년에는 피닉스 지역에서 부동산 개발에 참여, 일시적으로 성공도 했다.


금융 감독이 허술한 틈을 이용해 한 밑천 챙긴 키팅의 사업은 결국 대형 금융사기로 막을 내렸고, 그는 2014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화려했지만, 추악한 스캔들로 막을 내린 그의 사업은 결국 저축대부조합을 이용한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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