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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22. 2020

초창기 미국 이민 : 버지니아 식민지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04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에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신대륙으로의 이주


당시의 유럽은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 인해 남아있는 경작지가 나날이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삶도 도시와 마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좁은 땅에 비해 활용할 수 있는 산림자원도 계속 감소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세 봉건주의 영주 계급의 무리한 수탈에 이어, 수익성을 높이고자 양을 키우는 목장의 증가했다.


소작농의 경작지 상실인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 모직물 공업의 발달로 양털의 공급 가격이 오르자 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양의 사육에 필요한 토지나 목장으로 변경한 것. 농토를 상실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게 된다)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었다.


영국의 영지 표시(녹색 부분이 공유지)  <출처 위키피디아>


이에 더해 스페인의 식민지를 통한 금과 은의 유입 증가에 따라 유럽 전체의 물가가 상승(가격 혁명)하는 현상이 발생된다.


 결국 도시 노동자의 삶의 질은 저하되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에 의해 실업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런던 시내를 배회하는 실업자나 빈민들을 모집, 미국으로 이주를 시도한 곳은 1606년에 제임스 1세로부터 특허장을 받은 버지니아 회사였다.


버지니아 회사를 통해 미국으로의 이주가 시작되고 나서, 이들이 정착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굶주림과 인디언의 습격 등으로 안정된 정착지로 도달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버지니아 회사의 문장  <출처 : 위키피디아>


초기 이주민들은 대부분 병들거나 굶어 죽었고, 농업에 익숙한 새로운 이민자들이 건너오면서 본격적인 정착지로 만들어져 갔다.


 정부가 아닌 일반 회사가 이주민 정착을 주도한 목적은 새로운 땅에서의 이윤 창출이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돈이 되는 무엇인가를 찾는 실험을 시행했다.


투자한 만큼 회수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장기간 투자의 보상 방법을 찾아야 했다. 회사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버지니아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버지니아 식민지의 담배 재배


결국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 담배 재배였다.


콜럼버스의 항해 때 유럽에 소개된 담배는 유럽에서 급속히 유행이 되고 있었다. 급속도로 인기를 얻으면서 수요가 공급을 넘어섰다.


그래서 담배 재배는 속칭 ‘떼돈을 벌 수 있는 작물’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기후로는 담배 재배가 불가능했다. 스페인을 통해 서인도제도의 담배를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존 롤프(John Rolfe, 1585? –1622)라는 사람이 최초로 버지니아에서 담배 재배에 성공하였다.


기존의 담배는 유럽인의 기호에 맞지 않았다. 식민지의 식물과 교배를 통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여 유럽인의 취향에 적합한 담배 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참고로 그는 1614년 인디언 포우하탄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와 결혼했다. 디즈니 영화 '포카혼타스'의 주인공이었다.


세례를 받는 포카혼타스. 뒤에 남자가 존 롤프다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담배는 1618년에 약 9톤 정도의 양을 영국으로 수출했고, 이후에도 담배 수출은 꾸준히 증가했다.


4년 뒤에는 3배로 늘어났고 1638년 에는 기존 담배 수출지인 서인도제도를 넘어서면서 유렵의 최대 담배 공급지로 떠올랐다.


담배 재배가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이주 회사의 토지 정책에 있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를 시작하면 약 20만 제곱미터의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정해진 노동 계약 기간 내에 이주비용을 지급하게 되면 토지는 이주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토지 소유권에 대한 동기부여가 강렬했다. 


담배 재배의 특성상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기존 이주민들은 신규 이주민이 들어올 때마다 이주 비용을 지급하고 계약제 하인으로 고용했다.


계약 하인은 정해진 계약 기간 내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기간이 끝나면 자유민으로 전환되어 토지의 소유권을 얻을 수 있었다.


1624년 버지니아 회사는 영국 왕실의 귀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미국 버지니아 지역은 국왕 직속의 식민지에 속하게 되고 담배를 독점 품목에 포함시켜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담배 농장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버지니아 담배는 식민지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식민지 내 자체적인 화폐제도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물물교환 매개체 정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버지니아 이주민들 특성은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받되, 식민지 내 문제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1619년 7월 제임스타운의 한 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버지니아 하원’이라 불릴 대표 회의를 구성하게 되었다.


영국 왕실로부터 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버지니아 자체적인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입법 기관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대농장주의 출현과 흑인 노예


수출의 규모가 커지고 작물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많은 토지와 계약제 이주민을 거느리는 소규모 농장주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미국 대륙으로 들어오면서 인구수가 늘어나고 경작지의 규모도 커지게 되었다.


네덜란드 상선을 통해 처음 들어오게 된 노예는 영국의 자발적 이주민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이었다.


버지니아 노예의 모습 (1850년) <출처 : 위키피디아>


이들이 처음부터 강제적인 노역에 시달린 것은 아니다. 계약제 이주민처럼 일정 기간이 끝나면 자유로운 신분으로 전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흑민 노예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비용 대 효과 측면에서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지 못한 농장주가 많았다. 점차 축적되는 부의 규모에 따라 신분상의 기준이 발생했다. 


가진 자의 이기심까지 겹치며 노예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더욱더 많은 것을 소유한 대농장주가 출현하면서 점점 더 낮은 비용으로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로 부의 재편이 고착화되면서 소수의 대농장주가 생기고 그 아래에 중간급 농장주, 그리고 토지를 소유한 농민과 노예의 구분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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