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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20. 2020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03

 산업혁명 이전까지 국가가 부를 증가시키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부를 축적하는 두 가지 방식


보편적인 방법 중 하나가 전쟁을 통해 승리를 거둬 정복지에서 약탈을 하거나 패전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는 것이었다. 결국 남의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배를 타고 외국으로 가서 그 지역의 특산품이나 희귀품을 가지고 돌아와 이윤을 남기고 파는 것이다. 또는 나라 사이의 무역에 관여하여 교역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 것이었다. 이것이 초기 산업 자본주의 구조가 만들어 지기 이전에 빠르게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었다.


16세기 스페인 갤리온  <출처 :위키피디아>


 이 두 가지 방법 중, 전쟁은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이 많았다. 이기면 남는 장사지만, 혹시라도 지게 되면 손해가 너무도 컸던 것이다. 더구나 자국의 군대가 아닌 용병을 통한 대리전쟁이라면, 한 번의 패배로 감당하기 힘든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이러한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가지고 있던 재산이나 영토를 상실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영토나 국가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다른 방법 중 하나인 교역 거래는 주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무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동양과 육지를 통한 교역로가 사실상 가로막히게 되면서 바다를 통한 무역 거래가 성행하게 된다.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출처 : 위키피디아>


이는 주로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상인들이 앞장서서 진행했다. 상인들은 직접 바다로 나가지 않고 가지고 있는 자본을 투자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직접 실행을 하지 못한 이유는, 장거리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기술과 숙련된 경험을 가진 경험자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사업을 진행, 자신의 부를 늘리는 방법을 시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선장이나 선원)의 충성심에 의지해 상인의 모든 재산을 걸고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부담이 컸다. 해상에서의 위험은 늘 존재했고, 그 위험이 단번에 모든 재산을 앗아갈 만큼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찾지 못한 길을 새로 개척하여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항로 개척에 투자한다는 것은, 일개 상인이 감당할 만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출처 : 위키피디아>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이러한 시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스페인(당시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공동 지배함)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것에 성공(산타페 협약)해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한 항로 개척에 나서게 된다.


당시 그가 품었던 것은 세 가지 소망과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찾는 것, 두 번째는 그곳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황금을 찾아 경제적 성공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열망을 가지고 1492년 세 척의 선단(산타 마리아호, 핀타호, 니냐호)을 이끌고 출발하게 된다.


 당시 콜럼버스가 이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출항을 할 수 있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를 지원한 스페인의 내부 상황이 정리된 영향이 컸다.


그라나다의 항복 - 레콩키스타의 완성  <출처 : 위키피디아>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 회복운동)


이 해(1492년)에 스페인의 오랜 숙원이었던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 회복운동)가 이루어져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하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의 결혼으로 통합된 국가의 힘이 과거에 비해 강력해진 것이다. 당시 해상의 강자(아라곤 왕국)와 내륙의 강자(카스티야 왕국)의 결합은 오랜 숙원이었던 유럽의 기독교 완성이라는 숙제를 해결한 것이다. 


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 발표


이에 더해 3개월 뒤에는 유대인의 추방을 내용으로 한 '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이 발표 한다. 1492년 3월 31일 조인된 칙령으로 그동안 이슬람의 호의를 받으며 경제적 영향력을 발전, 확대해 온 유대인을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쫓아내기 위한 방법이다.


이 조치로 대부분의 유대인이 스페인을 떠나게 되었으며, 그동안 모아두었던 수많은 재산을 모두 남겨놓고 쫓겨나야 했다(칙령의 포고문 내용에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 외국으로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조항이 있지만, 사실상 불가능했다).


알함브라 칙령 사본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유대인이 헐값에 넘기거나 남기고 간 막대한 재산은 모두 스페인 왕국으로 귀속 된다(쫓겨난 유대인은 대부분 전문적 지식과 자본을 가진 인력이었고,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을 거쳐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이는 경제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경제적 패권을 가진 국가의 전성 시기와 유대인의 이동 시기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이런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모두 마무리되면서 향후 왕국의 팽창과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는 콜럼버스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결국 콜럼버스는 1493~1502년간 세 차례에 걸친 탐험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그 결과로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후에 이탈리아 탐험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는 인도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대륙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신대륙의 명칭은 아메리고의 이름을 본떠 ‘아메리카’로 이름 짓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의 콜럼버스 기념탑  <출처 : 위키피디아>


 어쨌든 콜럼버스가 발견한 새로운 항로로 당시 유럽의 무역항로가 지중해에서 대서양 중심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스페인은 대서양의 새로운 항로를 이용, 정복 활동을 통해 식민지를 적극 개척한다. 


아울러 자국의 군대를 주둔시켜 통치에 나서게 된다. 이후 이 곳(남아메리카)에서 들여오게 된 막대한 자원(금과 은 등)을 바탕으로 단번에 유럽 상업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레콩키스타

 718년부터 1492년까지 이어진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위치한 가톨릭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몰아내고자 진행한 이베리아 반도 회복 운동. 이는 1492년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연합왕국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완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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