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 생기듯, 모든 변수를 품고 사는 건 어쩔 수 없다
“평범한 것이 이토록 감사한 것이었나?”
뜻하지 않은 검진 결과로 암 수술을 한 지인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평소에 건강에 무척 자신을 하던 터라 수술 후 후유증에 당황하고 있었다. 나 또한 질병이라면 누구에게도 수에서는 지지 않고 살았지만, 그런 수술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오지랖으로 한마디 했다. ‘잃어가는 것에 대한 마음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한다. 주변보다는 본인을 생각하라’고 충고를 했다.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에게 한 말로는 너무 교과서 같은 말이었다.
아프면 일단 서럽다. 내가 복지 상담을 해보아도 가난한 사람이 병이 들고 힘들어도 야무지게 사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경우지만 일단 내가 지원을 연결해서 그것만 해결하면 또 잘 살았다. 그런데 과거에 건강했던 사람. 혹은 상담 전에는 잘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전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부터 무너져서 상담하기가 난감했다.
딱히 상담하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충고 한마디 하듯, 나 스스로 수많은 질병을 접하다 보니 평범하게 질병을 대하는 어른의 자세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모든 아픔을 예측하고 계획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30대 중반이 되어 많이 꿈꾼다. 아픈 건 어쩔 수 없다면 적어도 내가 쉬는 타이밍에 적절하게 아프면 감당을 하겠다. 그렇지만 너무 한꺼번에 몰리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 마음. 아픔의 지연을 꿈꾸는 정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나만의 어른스러운 마음이었다.
대부분은 20대쯤 누렸던 젊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비교하고 슬퍼진다. 20대의 평범함을 하나하나 잃어가는 과정이 30대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시기가 40대라서 그럴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큰 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고 큰 수술을 통해서 어디 하나 불편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다는 것에서 안도하고 살아가며 최소한만 아프려고 병원에 다녔다. 아프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에 평범한 질병으로도 온종일 고민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하루를 보낸 시간도 있음을 고백한다. 평범하게 드러내는 질병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희소한 질병을 갖고 있었다면 태어난 자체를 원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곧 40살을 맞이하는 처지에서 돌이켜보니, 나는 바이러스나 물리적 요인으로 다칠 때 고통에는 경험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자체를 공유하는 것에는 딱히 서럽지 않았다. 아프면 그냥 ‘티’를 내면서 병원에 다녔다. 그리고 약도 먹고 누워도 봤다. 불편은 했지만, 어느 정도 약만 먹고 시간만 지나면 좋아졌다.
하지만 정말 내가 힘들었던 것은 주변 환경과 나 스스로 갖는 마음의 병이 더 컸다. ‘이 정도면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일이다.’라며 버티고 버티다가 슬슬 횟수가 많아지고, 너무 많아서 누구에게 말하지도 않고 슬쩍 넘어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말 못 할 일들이 많아지고 나름의 이유가 생기는 것 아닐까? 예측할 수 없게 질병이 생기듯 사는데도 변수가 많아서 나이 듦이 더 아픈 것 같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병이 있다. 발병의 이유도 있다. 그냥 아닌 척, 모른 척할 수 없고, 누군가 아는 척을 하는 것도 거북한 나만의 질병. 나는 그것이 내 주변 환경이었고, 내 마음의 병이었다. 뜬금없이 고백하자면, 나는 몇 년 동안 우울증이라는 형태의 질병에 고통받아 왔다. 세상 자체를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삶을 살아온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숨기고 싶지만, 딱히 숨기지 못하는 그 병 말이다. 예방할 수 없는 변수의 삶과 질병은 나를 또 다른 병원으로 인도했다.
(2단원의 글을 마칩니다. 이제 제 마음의 병을 다루는 3단원으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