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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일어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마흔에 다시 읽고

by 이춘노

IMF가 터지기 전인 1996년. 어느 시골 도시의 고등학생이 자전거를 멈추고, 작은 서점에 들어갔다. 그리고 익숙한 듯 묻는다.

“책 들어왔어요?”

“오늘 들어왔지.”


학생들 수업 교재들만 파는 작은 서점에서 서점 주인은 기특한 표정으로 따끈한 역사책 한 권을 소년에게 주었다. 소년은 주머니에서 꺼낸 배춧잎 한 장을 서점 주인에게 건넨다. 그리고 잔돈을 챙겨서 그 책을 소중하게 가방에 넣었다. 소년은 무라카미 하루키도 좋았지만, 그보다 시오노 나나미가 더 좋았다. 자칭 문학소년은 <로마인 이야기 4권>이 가방에 있는 그날이 너무 행복했다.

소년은 세월이 흘러 마흔 아저씨가 되었고, 그 책을 다시 꺼냈다. 전에 일하던 면사무소에서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데, 책이 필요하다고 해서 기증할 책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앞으로 읽을 책을 놔두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박스에 담아서 30권 이상 보냈다. 역시나 이 책은 다시 주변에 두었다.


참 오래된 책이지만, 난 이 책을 남에게 보낼 생각이 없다. 본가에 시오노 나나미 책은 거의 모두 책장에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로마인 이야기> 2권 한니발과 4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편은 이사하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다시금 펼쳐 든 책의 내용 중에서 소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흔에 일어서다’


격하게 눈길이 가는 문구에 심장이 뛰었다. 소년 시절에 읽었던 순간에도 참 좋아했던 지점이었다. 도망만 다니며 주변을 떠돌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변곡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교롭게도 마흔이라니, 어쩐지 나에게도 그러한 전환점이 되지 않을지. 슬며시 기대하며, 책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나의 승리처럼 갈리아 전쟁을 마치고, 자신을 역적으로 만든 원로원을 향해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했던 명언.

“주사위는 던져졌다.”

마흔에 다시 읽으니, 문학 소년의 감성과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다르게 와닿았다. 그렇다. 나도 이미 주사위는 던졌고, 강을 건너는 중이다. 참 감정 이입하기 좋은 때에 다시 마주한 책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참 좋아한다. 그 역사 중에서도 전쟁사를 참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영향은 시오노 나나미라는 작가 때문이다. 딱딱한 역사책을 정말 쉽게 풀어서 속도감 있게 몰입하는 방식은 나를 반하게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그녀의 책을 사서 읽는 이유기도 하다.

물론 나중에 내가 책을 접하는 방식이 넓어지고, 실제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내전기>와 다른 작품을 접하고, 그녀의 역사적 맹신은 접었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역사 소설가니까. 교양으로 접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우리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역사서로 접근해서 보는 처지도 있으니, 좀 더 건조한 진수의 <삼국지>는 읽기 싫은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사실 여러 가지로 각색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드문드문 드라마틱한 허구라는 점을 알고는 얼마나 실망했던지.


그렇지만 난 <로마인 이야기>가 좋다. 만화책을 좋아하고,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기만 할 뻔한 고등학생이 책을 잡았다. 어디든 가고 싶을 질풍노도의 시기에 역사와 필력으로 내 엉덩이를 붙들어 놓은 책. 그리고 로마를 가고 싶게 만들었고, 작가라는 꿈을 꾸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 책이 누르스름하고, 새 책의 풋풋함은 사라졌지만, 다시금 책장을 폈다. 그리고 꿈꿔본다. 나의 마흔은 어떻게 일어설지. 카이사르처럼은 아니더라도 일어 설 때는 된 것 같아서 내심 그 문장이 깊게 남는다.

당시는 이 좋은 책이 9,000원이었다. 용돈으로 받은 만원으로 책 한 권을 사고도 콘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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