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도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나는 왜 안내도를 안 보고 무조건 직진하는가?

by 이춘노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전주에 큰 대학 병원을 갔다. 차를 산 지 꽤 되었는데, 시내 말고 부모님과 다른 지역을 갔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생애 첫차를 사고 초보 딱지를 떼기도 전에 여행을 가보긴 했어도 부모님과는 마트나 교회뿐이었다. 그러다 처음 타지로 나간 이유가 병원이라니······.

실제로 동네 내과나 남원에 제일 큰 병원 검사는 부모님이 가셨지만, 전주는 아무래도 내가 안심이 안 되어 연가를 내고 전주로 갔다. 2019년의 여름은 태풍과 폭우가 많았다. 그리고 7월의 정기 인사로 면사무소 직원들이 바뀌면서 업무도 변동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어머니께 넉넉하게 현찰을 드리며 택시도 타고, 맛난 것도 드시라고 했지만 역시나 결과는 내가 들어야 했다.


7월 중순에 갑자기 어머니 간 수치가 급격하게 높아져서 한 번 더 피검사를 했지만, 의원급 병원에서도 큰 병원을 안내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역에서는 제일 큰 의료원에 가서도 CT 검사와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더 큰 병원을 가라고 소견서를 써줬다. 무작정 두 노인이 전주에 대학 병원에 가서 기다리고 검사를 받았을 생각을 하니 마음은 쓰였지만, 갑자기 연가를 내기도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가는 길이다. 며칠을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은 본인을 포함한 가족들도 예민해졌다. 식사는 잘하지 못하셨고, 피곤하신지 차를 타는 중간중간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도 같이 잠을 못 주무신 것 같았다. 운전하면서 차 안에서는 음악도 없이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만 들렸다. 시간이 늦을까 봐 고속도로를 타고 갔는데, 순간 정신을 놓으면 과속 경고음이 들렸다. 운전하고 있지만, 정신이 없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간혹 들리는 한숨 소리가 나한테 나는 소리인가 싶어서 입술이 꽉 다물었다.


2019년 여름에 나는 주변에 힘든 일들로 마음이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나이가 37살이 되면 보통 갖는다는 결혼생활이나 육아의 고충은 아녔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혼자만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항상 무언가 나를 괴롭히는 것은 존재했고, 슬슬 피하고 싶었다. 특히나 가족에 대한 문제는 나에게는 조금 특별했다.

평범이라는 말을 이성으로 만났던 사람들에게 제법 들었다. 성격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크다는 것도 나 스스로 알고 있다. 오히려 그것에는 상처는 받을지언정 깔끔하게 인정했다. 돈이 없다는 것도 살면서 지나치게 절제해온 습관이 있어서 딱히 불편한 것은 없지만, 누군가와 하나가 되려는 순간에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사실 남들처럼 평범하게 고민하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주의가 강한 성향도 있지만, 솔직히 돈이 문제였다.

32살에 첫 직장을 갖기 전에도 연애를 했지만, 당시에는 그냥 취업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남들이 가진 것을 갖추고 살다 보니 나 혼자 무엇을 하기에는 따라가기 벅차다는 생각을 몸으로 느꼈다. 가난하다는 말을 어릴 때는 듣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리 말을 하지 않아도 난 가난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문제는 나라에서 주는 기초연금 소득 말고는 통장 잔액 없는 부모님. 아들이 드리는 생활비와 그 기초연금이 생계 전부가 되어버린 노부모가 있다는 것은 냉정한 혼인 시장에서 마이너스가 되었다. 굳이 내가 서울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온 이유도 부모님이었고, 매달 내 월급에서 부모님의 생활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신규 직원으로서는 부담이 컸다. 게다가 그러한 책임을 기약 없는 시기까지 함께 해줄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확실히 내가 능력이 뛰어났다면 이러한 문제는 생기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돈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로또가 되어서 순간 몇억 원이 생기지 않는 한 달라질 리 없는 삶에서 만약을 찾고 살 순 없었다.


오후에 예약한 의사와의 진료 시간 내내 소화기 내과 진료실 앞에서 기다렸다. 내가 와본 곳 중에서 제일 정신없는 공간 같은데, 그래도 한 번 와보셨다고 길을 찾으셨다. 이름과 바코드가 찍힌 스티커를 손등에 붙이고 계속 만지작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나도 초조해졌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려서 만난 의사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손은 마우스 롤을 이리저리 돌리며 MRI 영상을 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간암 3기 초반 정도 되십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간혹 이런 장면을 봤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담담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이미 알고는 있었다. 병원을 자주 다니는 사람은 질병에도 촉이란 게 있다. 수술 여부와 치료 일정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어머니가 수술을 안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의사는 그래도 수술을 받을 시기이니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하는데, 너무 덤덤하게 안 받고 싶다는 말을 하셔서 일단 다음 주에 다시 오기로 하고, 진료비 감면 청구를 위해서 산정 특례 신청서 안내를 받고 진료실을 나왔다. (이것도 내가 민원인에게 항상 안내했던 서류였다.)


멍해지는 상황에서 간호사가 그렇게 자세하게 알려줬는데, 참 병원이 복잡하고 넓어 보였다. 이럴 때는 병원에도 내비게이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는 수술을 안 받겠다고 하셨을까?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2년 전에 외삼촌이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가 생각나서 그러실까? 아니면 수술을 하고 깨어나기 힘드셨다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수술실 기억 때문에 그러셨을까? 공단으로 보낸 서류가 처리되는 시간 30분간 고민을 했다.

정말 아무 말 없이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가는 동안 내가 아까 내 고민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아들이 그래도 돈을 버는데, 수술비가 걱정돼서 그런 거면 수술받으세요. 내가 엄마 결정을 존중은 하겠지만, 그래도 아들은 엄마가 수술을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는 내 말을 듣고는 창밖에 풍경을 보시더니 내려갈 때는 고속도로 말고, 국도로 가자고 말씀하시고는 딱히 대답이 없으셨다. 그냥 풍경이 보고 싶으시다고. 그 말씀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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