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간호는 혼자 할 수 없다

간호의 딜레마

by 이춘노

2008년 11월에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할 무렵이었고, 다음 달이면 본격적으로 학원 수업을 듣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통의 전화에 허겁지겁 달려간 전주에 어느 대학 병원 응급실에서 위독한 아버지를 마주했다. 돌아가실 수 있는 상황이었고,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부터 아침 · 점심 · 저녁 시간 면회에 꼬박꼬박 들어가서 인사를 드리고,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마다 사서 보충하는 것뿐이었다.


당시 예수병원에는 보호자를 위해서 내무반 같은 대기실이 있었고, 가운데 이동통로 양쪽으로 전기 열선이 깔린 방바닥이 있었다. 그래서 간혹 교대를 위해서 어머니가 전주에 오실 때 말고는 나는 그곳에서 기약 없는 대기를 했다.

처음에는 운동화와 점퍼뿐이었는데, 이불과 수건, 슬리퍼, 치약, 칫솔 등 병간호를 위한 도구가 하나둘 늘었다. 그리고 보호자들만 있는 그곳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는데, 옆에 새로운 할아버지 보호자가 오셨다.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수술하고,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나와 비슷하게 기다리는 중이셨다.

그런데 특이했던 점은 거의 2일에 하루씩 할아버지를 챙기는 보호자의 보호자가 바뀐다는 점이었다. 자녀가 7명이라는데, 형편에 따라서 할아버지를 챙기려고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은 아드님이 오셨다가 며느님이 오셨다가 따님이 오시기도 했고, 사위도 자리를 지켰다. 2주가 넘어서는 처음에 뵙던 자녀를 다시 만나서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고 나에게 밥도 사주셨다.


그리고 그분들은 내 사정을 듣고는 걱정했다. 이유는 자녀가 하나뿐인 우리 집 사정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집으로 가서 씻고 쉬다 왔지만, 그 외는 병원에서 거의 생활하다시피 해서 지리도 모르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정도가 되었다. 은행 ATM기가 쓰던 은행에 카드는 사용할 수 없어서 근처 은행 출장소에서 체크카드도 발급해서 생활하고, 필요한 서류를 위해서는 걸어서 주민센터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다 차츰 그곳이 내 생활권이 되어가고 있었다.

슬픈 것은 딱히 할 것도 없지만, 그곳을 벗어나긴 힘들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1주 정도 지켜보다가 주말이 한 번씩 지날 때마다 기대감도 무뎌졌다. 그냥 단순하게 병원에서 기다렸다. 기저귀랑 기타 처치는 간호사가 다 하는 상황에도 혹시 의사가 급하게 찾을 것을 대비해서 난 한 달 가까이 있어야 했다.

그때 어르신이 했던 말씀이 생각이 났다.


“혼자 이런 일 하려면 너무 힘들어, 부모님이 하나 더 낳으셨음 좋았을 건데.”


솔직히 버거웠다. 저렇게 형제가 많았으면 했다. 혼자 결정하는 것보다는 상의하며 책임도 나누고 싶은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혼자라서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고 해도, 나 같은 외동들은 사랑보다는 책임의 부담을 더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내 탓인 그것처럼 자괴감이 들다가도 강요된 선택 없이 잘 마무리된 것에 감사했다.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나마 지금은 굴리는 차도 있다. 아버지가 거의 어머니 병간호하고 있지만, 또 그 아버지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나이다. 직장이 있고, 곧 40살이 되어가도 마땅히 보호자의 보호자 역할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지금 나는 누구의 보호를 받고 있었을까?

문뜩 커피를 마시다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동생 좀 하나 더 낳지 그랬어요? 나도 좀 시키게.”


어머니는 실없는 소리라며 웃고는 더는 말씀이 없었다. 나는 좀 진지하게 말했던 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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