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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골

24년 9월 2일 월요일

by 보리남순


참외는 과채류로 분류된다.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과일이든 채소든 별 상관이 없겠지만, 판매를 목적으로 키우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채소보다는 과일이 더 나을 것이다. 채소값보다 과일 가격이 더 비쌀테니까.

올 해는 수박 가격도 참외 가격도 만만치 않다. 라면, 김밥이 가볍게 사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어버린 것처럼, 수박 한 통, 참외 한 봉지는 이제 주머니 가벼운 아빠가 퇴근길에 사들고 갈 수 있는 만만한 과일이 아니다.


우리 마을과 인접해 있는 마을 신봉리는 옛날부터 참외골로 불렸다. 참외골 답게 그곳을 지날 때면 노랗게 익은 밭 참외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참외골로 불리는 신봉리 마을은 아주 오래전 마을 뒷산 계곡에 물이 불어나서 토사가 쓸려내려와 생긴 땅이다. 사람들은 새로 생긴 땅을 신촌동이라 부르다 봉상동과 합해지면서 신봉리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골말과 곡촌이 있으나, 오래된 사람들에게 이곳은 참외골이 더 익숙하다.


푸른 나무와 계곡의 기억을 간직한 참외골에서는 참외가 잘 자랐다. 참외는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물을 좋아하는 작물이다. 참외는 덥고 습한 우리나라 여름이 키우는 과일이다.

참외골에서 자라는 참외는 동네에서 자라는 참외보다 더 빨리 자랐고 일찍 수확을 했다. 참외를 키우는 참외골 농부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노란 참외가 바구니에 담겨 가격표를 달고 있으면, 도로 위를 달리던 차들이 멈추어 서서 코를 대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 손에 들고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참외를 싣고 떠났다. 참외골 사람들에게 참외 판매로 얻는 소득은 보너스였으리라. 가을 수확 전, 농부들의 마른 주머니를 채워주던 고마운 작물이었을 것이다. 20여 년 참외골 이야기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참외골에는 참외를 볼 수 없다. 참외를 키우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남아 있는 사람도 노동하지 못하는 낡은 몸이 되었다. 어두운 방안에 남은 그들에게 뜨거운 여름과 노란 참외는 그리움일터다. 젊은 그들의 뜨거웠던 시간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참외의 줄기가 뜨거운 여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서서히 말라가듯, 참외를 키웠던 참외골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천천히 조금씩 잊혔다.


참외골과 이웃해 있는 내 텃밭에서도 참외가 잘 자랐다. 땅속 물줄기를 찾듯 이골 저 골로 줄기를 뻗어 나가며 마디마다 참외를 달았다. 노랗게 잘 익은 참외는 달고 물이 흐른다. 여름땡볕에서 자란 참외는 서늘한 기운으로 달궈진 8월 더위를 식혀주었다.

8월 중순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참외 잎이 노랗게 말라갔다. 채 마르지 않은 줄기에 알알이 참외가 달린 채로 나날이 말라갔다. 마지막 기운으로 꽃도 폈다. 군데군데 털이 보송보송한 애기 참외도 보이고 반쯤 익은 참외도 있다. 생의 끝자락에서도 참외는 최선의 힘으로 오늘을 살아냈다. 그리고 나날이 조금씩 말라갔다.

그들의 봄날은 그렇게 또 다른 계절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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