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딜리버리 정

2019년 10월 29일

by 선량한해달

"뭐. 이 정도면. 잘 나왔고."


송과장의 오케이로 꼬박 두 달을 갈아 넣은 사록이 끝났다. 이제 정대리의 목을 죄던 올가미를 벗겨줄 공문만 발송하면 디엔드다. 리드미컬한 정대리의 손놀림을 따라 공문이 작성된다. '액세스공사 4개년 사록 출간 알림'. 수신자 각 처, 실, 지방본부 체크, 전략처-9865 체크, 발신자 전략처 과장 송보강 체크, 처장인 체크, 줄간 체크, 자간 체크, 오타 체크, 첨부파일 체크.


"감사실, 지방 본부는 빼고"

"넵."

"이건 정민이 니 꺼여. 발신 정민이로 하고. 수고했고."

"아, 네엣."


정대리는 내 이름으로 발송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심혈을 기울여 제작할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발신자를 바꾸고, 수신자에서 감사실과 지방 본부를 제외한다. 모든 것이 평상시와 같다. 자연스러웠다. 이제 됐다. 정말 끝이다. 른 전결.


'그나저나 구천팔백육십오라니. 아직 10월인데 무슨 공문 시행을 이렇게 많이 했지.' 정대리는 소소한 감상과 함께 오른손으로 발송 버튼을 르며 왼손으로 처 순둥 포인트들에게 알림 전화를 돌린다.


"안녕하십니까, 19층 귀염둥이 전략처 정.민.입니닷. 우리 모두가 증오해 마지않던 사록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실물 배달은 딜리버리 정이 직접 갑니다. 받자마자 불태워주십쇼! "

"어후, 고생했어요. 석유랑 라이터 준비하면 돼요? 뭐, 혹시 누구 찌를 식칼 같은 거 필요해요?"


이대리님은 천사다.


"온니~ 고생했쪄요. 공문은 벌써 접수했지! 직접 올 거야? 언제 올 거야? 나 지금 젤리 많아."


지아 주임은 사랑이다.


"실물 돌리고 오겠습니다."

"옹냐, 감사실은 빼고."

"네."


정대리는 영업처 이대리가 빌려준 대형 카트에 오백 장 짜리 사록을 열 부 실었다. 한 부를 빼서 캐비닛 위에 똑바로 놓고 결과 보고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다. 탄탄한 가죽 커버에 둘러싸인 출판물은 휴대폰 화면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정대리는 자석을 박아 마감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사진 촬영을 하던 백서 한 권을 슬그머니 뒤집어 개인 캐비닛에 넣는다. 감정 없는 지긋지긋함 속에서 피어난 애착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남은 사록 스무 부는 박스에서 꺼내 비닐을 둘러 전략처 캐비닛으로. 이제 정 딜리버리가 19층을 돈다. 그렇게 모든 부서의 공용 캐비닛 맨 아랫칸 어딘가에 정대리의 피와 땀이 공식적으로 내팽개쳐지고 있었다.




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맑음


<신입1>

교육 2일 차다. 첫날에는 실망이 컸는데 19층 대강당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는 그럭저럭 괜찮다. 일부러 한 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을 가며 사무실을 살피고 있다. 나는 전략처로 발령날 예정이라는데 화장실 가는 길에는 전략처가 없다. 어디에 있는 거지? 막 숨어서 전략 짜고 그러나?


현장으로 가는 친구들은 여덟 명이다. 걔들은 동기가 많아서 좋을 것 같다. 발령받고 나면 자주 못 볼 것 같아서 아쉽다. 내일도 같이 앉아야겠다. 나보다 어린데 다들 자격증이 있었다. 기특한 아이들이다. 동생들이 잘 되면 이런 기분일까? 내가 괜히 뿌듯하다.


그리고 오늘 전략처 선배를 한 명 봤다. 165 정도 되는 키에 마른 여자였다. 이 회사 여자들은 전체적으로 마른 것 같다. 잘 웃고 착해 보였다. 4개년 사록을 나눠주고 훌쩍 떠났다. 사록은 엄청 두껍고 무겁다. 1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책에서 풍기는 냄새가 좋다. 비누 냄샌가? 아닌가? 가죽 냄샌가?


<신입2>

사회공헌처 하나, 인사 하나, 재무 하나. 열다섯 중 사무실 오른쪽으로 발령받는 사람은 나까지 다섯. 조심스러운 성격들에 30대도 드문드문 섞여있다. 그 외 영업이 둘, 나머지는 현장. 이틀째부터 자연스럽게 사무실 오른쪽, 왼쪽으로 나누어 앉고 있다. 더 자주 볼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인지상정이지.


오늘은 대리님을 뵈었다. 전략처에 몇 분의 대리님이 계신지는 모르나 책 배달을 오셨으니 아마도 막내 대리님일 것이다. 흑발, 흰 피부, 끝부분에만 씨컬이 살짝 걸린 생머리, 볼륨 없이 옆으로 흐르는 긴 앞머리, 구태여 가린 넓은 이마, 선명한 눈썹, 또렷하게 가늘고 긴 눈, 작은 코와 입, 각이 보이는 턱, 적당한 화장, 채도 낮은 파스텔 그린 블라우스, 밝은 베이지 슬랙스, 와인블랙 로퍼. 소매와 바짓단까지 신경 쓴 차림새.


단정한 사람이었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완벽을 둘러쓰고 있는데 사람 자체는 순해 보였다. 그리고, 향기. 정민 대리님은 자기만의 향을 가진 사람이다. 정민이라는 사람을 아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 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비슷한 향에 도전하지 못할 것 같다.


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부서인 걸까. 개인의 성격일지도 모른다. 아직 판단하기엔 이르다. 퇴근 후 사록을 펼쳐 사진만 쭉 훑어보았다. 곧 퇴진한다는 사장 사진이 가득하다. 이건 가는 사람에게 예를 갖추는 책이다. 사진으로 추측 건데 처장님들은 대체로 50대 중후반이고, 그중 가장 작고 까만 사람, 중앙에 서있는 사람이 전략처장이다.


<감사실 이주임> 신입 중에 이상한 애가 하나 있다

신입이 인사를 안 한다? 기가 막히네 정말. 내가 입사했을 때도 우리 기수 인사 안 한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 혹시 내가 꼰대가 된 건가? 첫날부터 유독 눈에 거슬리는 놈이 하나 있다. 선배를 보고 인사도 없이 베실베실. 비서님 여기 물 10잔요, 비서님 여기 더운데요. 비서님 강사님 안 오시나요, 비서님... 말끝마다 비서님 비서님, 미친놈인가 싶다. 분명 명패에 주임이라고 쓰여있는데 그 새*만 유독 주임님이 아니라 비서님.


아무리 회사 돌아가는 걸 모른다고 해도 인간이면 눈치라는 게 있지 않나? 동기들이 다 주임님, 선배님이라고 부르는데 왜 비서님이래? 지가 사장이야, 실장이야, 처장이야 뭐야. 뭐래 진짜... 아 , 열 받아. 혹시 눈이 나쁜가? 아니면 내가 그놈한테 뭘 잘못했나? 아니야. 이건 그냥 내가 우스운 거지. 그 새* 이름이 최유빈. 너 이 새* 내가 지켜본다.


다음에 19층 가면 민이 언니한테 신입 중에 이상한 놈 있다고 조심하라고 말해줘야겠다. 저거 어디지? 영업인가? 마케팅? 홍보? 못생겨가지고 바짓단 껑충한 게 중딩이야 뭐야. 저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나? 부끄럽지도 않나봐. 자기 전에 저주하고 자야지. 망해라 최유빈이 너 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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