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왔다(후편)

2019년 10월 28일 오후

by 선량한해달

잔챙이에 의한 잔챙이를 위한 잔챙이의 회의가 끝났다. 정대리는 그 자리에 감사실장이 있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기조실장도, 신추실장도, 미기연실장도, 전략처장도. 영업처장, 기술처장, 지방본부장들까지도 19층에 있다. 왜 저 양반만 18층에 있단 말인가? 회의가 진행되는 두 시간 동안 송과장은 어딘가로 끊임없이 연락을 해댔다. 전략처 막내 대리가 진행하는 심하게 격 떨어지는 18층 회의는 별 긴장감 없이 점심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뒤뚱뒤뚱 굴국밥집으로 향하는 아저씨들의 뒷모습이 짠하다. 입맛이 사라진 정대리는 땀으로 말라붙은 앞머리를 포기한 듯 양옆으로 나누어 붙이고 멍하니 회의실 구석에 앉으려다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처장님은 어디 가셨나 보지?"

감사실장이다. 강처장과 송과장은 이전 기관에서부터 감사실장과 사이가 안 좋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정대리는 재빨리 회의실을 떠나지 않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아, 네. 저희도 요즘 일정 공유를 못 받고 있습니다. 워낙 바쁘셔서요."

"요즘 19층은 어때?"

"똑같죠, 뭐. 헤헤."


힘들다.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 주제를 바꿔야 한다. 가장 소프트하고 드라이한 주제를 찾자. 사람. 사람이다. 감사실에 동기가 있던가? 아, 7기는 이제 나 혼자지. 나쁜 놈들. 그럼, 후배, 그래, 후배다. 우리 지아는 사담으로 쓰기 싫고. 한 놈 있다. 기택이!


"윤주임은 잘 지내죠?"

"택이? 아, 정대리랑 동기라 그랬던가?"

"후배예요. 제가 7기고 윤주임이 8깁니다."

"음, 그 기수들이 일을 잘해."


감사실장은 정대리 옆에 다가와 조용히 몸을 낮추어 앉는다. 정대리는 앉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앉는 대신 문이 열려있는지 확인했다. 열려있다. 세이프. 문틈으로 지아 주임과 눈이 마주친다. 아, 이번에 지아가 대표이사 비서 겸직 발령받았던가? 눈인사를 한다. 최대한 찡그려 보였다. 이 험한 상황에 한 줄기 빛 같은 지아가 있어 다행이다. 18층 회의실이 대표이사실에 붙어있는 게 이렇게 다행일 수도 있다니.


정대리가 요상한 표정으로 지아 주임과 얼굴로 대화하는 동안 감사실장은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한다. 전략처 막내에게서 19층 정보를 캐낼 수 있을까? 열린 문틈으로 비서실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19층 회의가 끝난 모양이다. 마주쳐서 좋을 게 없는 사람들이 곧 이곳을 지나칠 것이다. 감사실장은 그대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가 굳이 7호기가 있는 18층 구석으로 향한다. 마침맞게 18층에 정박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19층을 누른다.


'니들이 내려오니 나는 올라가야지.'




"언니!"


지아는 귀엽다. 언제 봐도 귀엽다. 정대리에게는 천사가 두 명 있다. 19층에 이대리가 있다면 18층에는 지아가 있다.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온 정대리에게 지아는 친동생 같은 존재다. 한 기수 아래의 기택이와 지아는 입사하자마자 감사실로 발령을 받았다. 현장 경험을 중시했던 전 사장이 퇴진하며 7기를 마지막으로 신입사원 현장 배치 방침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입사 연차는 정대리가 일 년 빠르지만 본사 발령은 기택이, 지아와 같이 받았다. 이 때문에 이 셋을 동기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지아 주임님, 민이 온니는 오늘 빡쎄유."

"으이그, 알지. 전략이 안 빡쎈 날도 있어? 사람들이 그 모양이니..."

"풉, 역시 비서실은 모르는 게 없네."

"이래 봬도 제가 감사네요. 오늘 19층도 하는 짓들 보면, 쯧.. 나쁜 놈들 으이그."


'아! 얘도 감사실이었지.'


정대리는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지아는 좋아하는 후배지만 감사실 사람이다. 작년 한 해동안 강처장과 송과장이 감사실을 드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아이는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감사실은 각 처의 사정은 몰라도 각 처의 치부를 알고 있다. 정대리는 나 같은 막내가 처의 치부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때마침 19층 회의를 마친 비서실장이 18층으로 복귀했다. 두리번거리는 것이 지아를 찾는 모양새다.


"야, 너 나가봐, 빨리."

"응응, 언니 또 봐."


발랄한 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지아의 뒷모습을 보니 안도감이 든다. 정대리는 역시 혼자가 편하다. 비서실장이 지아를 혼내지는 말아야 할 텐데 걱정하며 펼쳐보지도 않은 것 같은 빳빳한 회의 자료들을 수거한다.


'감사실장님만 제대로 보셨네.'

정대리는 거의 구김이 없는 종이 더미를 수거할 때면 항상 회의감을 느낀다. 이면지로도 활용 못하는 파쇄기행 쓰레기를 양산하기 위해 그토록 구슬땀을 흘렸던가.


"언니!"

"!"


갑자기 열린 회의실 문틈으로 귀여운 지아의 재등장이다.


"후배님들한테 내 말 좀 잘해줘, 이번에 감사실에는 신입이 없대. 빠이~"


제어장치 때문에 유독 느릿느릿 닫히는 회의실 문이 잔잔한 바람의 파동을 일으킨다.


'여긴 대표이사실 옆에 붙어있어서 문도 조용히 닫히는구나.'

정대리는 오전에 흘린 땀이 미처 닿지 못한 곳에 있는 어깨 근처의 건조한 머리칼이 살짝 날리는 것을 느꼈다. 앞주머니에 대충 말려들어간 사원증과 바람과 빈 공간이 정대리에게 잔혹한 자각의 시간을 선사한다.


'아, 맞다. 신입!'




2019년 10월 28일 월요일 맑음 뒤 흐림


<신입1> 오늘부터 사무 6급

이 날이 왔다. 첫 출근이다. 출근 시간은 오전 11시. 신입사원 도입 연수 시작 시간은 점심식사 후 오후 1시였다. 긴장된다. 조금 일찍 가라는 엄마 말을 듣고 일찍 집을 나섰다. 이제 내일부터는 나도 지옥철을 경험하겠구나 생각하며 회사에 도착하니 10시밖에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빨리 도착한 것 같았다.


로비에서 19층 가는 엘리베이터를 물었다. 중앙 엘리베이터란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레드카펫이 깔려있어 머쓱했다. 버튼을 여러 번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도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아 당황했지만 이미 지나친 가장 초입에 있는 1호기가 열려 있는 걸 못 본 것이었다. 부끄러웠다.


사무실은 사원증을 태그하고 들어가는 시스템이어서 한참을 문 앞에서 서성였다. 자동문 안으로 보이는 거대한 아트월에 회사 로고가 붙어있고 그 아래에 택배 상자, 택배 상자 옆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아직 10월 말인데 벌써 트리가 있다니 회사란 참 빠른 템포로 돌아가는 것 같다.


5분 정도 서성이고 있는데 택배를 가지러 온 사원 하나가 문을 열어준다. 처음 만나는 선배다.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근처에 계시던 다른 선배들도 나를 봤다. 웃으면서 벌써 왔냐며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오른쪽 어디론가 달려가서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멍하니 복사기 앞에 서서 사무실을 살폈다. 생각보다 컸다. 한 백 명 되려나? 18층에도 본사가 있으니 규모가 꽤 큰 것 같다. 월요일 오전인데도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인다. 빈자리도 많고 시설도 좋다. 여기 어딘가에 내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벅차올랐다. 열정이 생겼다.


잠시 후에 드라마에 나올 법한 커리어우먼이 척척 다가왔다. 동그란 커트 머리에 까만 피부, 차가운 인상의 그 사람은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내 이름을 대충 확인하고는 턱끝으로 작은 방을 가리켰다. 분명 메일에는 19층에서 발령 예정 부서 인사 후에 18층 회의실로 이동해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19층 대강당으로 이동해 교육을 한다고 했는데, 왜 그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던 작은 방을 안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비키라는 듯이 손짓을 하는데 기분이 나빴다. 사회에도 저런 비매너가 살아 숨 쉬고 있구나 생각했다. 괴팍한 속눈썹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았는데...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내야겠다. 언짢은 기분을 뒤로하고 문 앞으로 이동했다. 걸으면서 혹시 누가 나보다 먼저 와있을까? 교육 교재가 책상에 쌓여 있을까? 선배들이 무섭게 노려보고 있을까? 별 생각을 다했던 것 같다.


문을 활짝 여니 어두컴컴한 그곳에는 웬 아저씨 하나가 책상 위에 양말을 뭉쳐 벗어놓고는 다리를 올리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신입2> 10시, 18시

x0800-0900 아침, 피아노

v0900-1000 청약홈체크

v1000-1030 회사착, 대기(1층 스타벅스-동기 찾기)

v1045 19층

1800- 퇴근, 저녁, 휴식

적당한 시간에 도착해 1층 카페로 가서 로비의 물레방아 조형물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15분쯤 지나자 신입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물레방아 앞으로 모여든다. 적당한 타이밍에 카페를 나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다같이 이동해 45분쯤 19층 도착.


월요일 아침이라 사무실에 자리가 많이 비었다. 먼지 쌓인 크리스마스트리, 10개월은 족히 지난 트리였다. 디테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거나 업무 분장이 자주 바뀌나 보다. 이 회사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아트월을 지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정중앙에 사회공헌처가 있었다. 여기도 공기업이구나...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영업처 앞 정수기 근처에 캐주얼 차림의 젊은 남자 선배가 서있다. 조용히 인사를 드리자 친절히 소회의실로 안내해 주셨다.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언뜻언뜻 부서 팻말을 살폈다. 사회공헌, 애매한 자리에 감사실이 있고, 인사, 재무, 전략 순. 오른쪽으로 갈수록 더 많은 자리가 비어 있다. 회의에 목숨을 거는 부서들이다. 전략처 뒤 벽면에 붙어있는 소회의실보다 더 안쪽으로는 깊은 복도가 있었다. 소회의실 앞에서 안내해준 분께 인사를 하고 뒤돌아 천장에 붙은 부서 표지를 순서대로 다시 훑어봤다. 전략, 재무, 인사, 반 막힌 벽, 감사실, 반 막힌 벽, 사공, IT, 영업, 마케팅. 그 뒤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순서인가 보다. 이 조직은.

<전략처 정대리> 망했다

정신 차리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신입사원 도입 연수가 시작된 후였다. 영업처 이대리님 말로는 소회의실에서 근로계약서를 쓰고 18층 회의실로 내려갔다고 한다. 오늘 아침 그 난리를 쳐놔서 에어컨은 빵빵하게 잘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오전에는 18층 회의실 슬라이드가 먹통이었다. 혹시 교육 때 PPT 못 돌린 거 아닌가? 회사 꼴이 말이 아니다. 우리 회사 그래도 그렇게 이상한 회사는 아닌데. 다행인 건 재무랑 영업도 회의가 바빠서 부서 인사는 못 했다고 한다. 하여간 월요일을 입사일로 잡은 인사가 문제다. 내일이면 사록도 도착하니 교육장 가서 우아하게 한 부씩 나워드려야지. 내 꼴을 생각하면 오늘 못 본 게 오히려 다행일 정도다. 망했지만 잘됐다. 전략처 신입이 아주 예의 바르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정말 괜찮은 놈들인가 보다.


<영업처 이대리> 저긴 아니라는 걸 알까?

전략처 회의 폭풍에 휩쓸려 험한 꼴을 당했다. 정대리는 저런 데서 어떻게 사는 건지. 한숨 돌리려고 커피라도 타마시려니 정수기가 말썽이다. 전략처쪽 정수기는 참 콸콸 잘 나오던데 왜 우리 쪽은 물방울이 맺혀서 또옥또옥 떨어지나? 지금 그쪽에 사람도 없는데 거기 가서 전략처 커피나 마실까 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단발이 다가왔다. 출입문 쪽을 보니 까만 옷을 입은 애들이 모여 서있었다. 풋풋했다. 죽으러 왔구나. 단발은 인상이 깔끔하니 강뭐시기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모양새가 대놓고 제2의 정대리다.


돼지도 보내기 전에 잘 먹인다는데 상냥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절반은 현장으로 도망치겠지. 가봐라, 거기도 지옥이다. 영업처에는 이번에 둘이 온댔는데 누구일까 궁금했지만 먼저 알 필요는 없다. 어차피 왔다 갈 놈들. 십여 명을 달고 소회의실로 가는데 괜히 우쭐했다. 텅텅 빈 전략처가 보여서 바로 뒤따라오는 강뭐시기한테 오늘 아침 회의 폭풍에 대해 살짝 귀띔해줬다. 자기 미래는 알아야 되니까. 소회의실 문을 여니 시커먼 놈 하나가 앉아있다가 일어난다. 어느 기수에도 혼자 떨어져 사는 저런 놈이 하나씩 있는 법이다. 설마 우리 애는 아니겠지? 선배답게 한 마디 해주고 나왔다. 우리 회사엔 유명한 말이 하나 있다고. '사무실 들어와서 오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말라.' 크으. 명언이다.


<비서실 이주임> 민이 언니는 좋겠다.

나중에 후배 오면 진짜진짜 잘해줘야지.


<인사처 신입사원 도입 연수 담당> ...

망할 전략처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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