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왔다(전편)

2019년 10월 28일 오전

by 선량한해달

"한차장아 정대리 좀 보내라."


영업처장의 애원에 겨우 회의 자료를 수정받은 정대리는 마지막 스퍼트를 올린다. 아직 8시 30분이다. 프린트아웃은 스무 부, 회의실 세팅은 어제 마쳤다. 취향 독특한 처장 셋의 음료가 차갑지 않은 것이 흠이었지만 이제 정대리도 짬이 찼다. 그것까지 맞춰줄 순 없다. 새로 받은 영업 것만 장갈이 하면 정대리가 할 일은 다한 것이다. '마이크는 필요한 사람이 알아서들 돌려가면서 쓰겠지.' 애초에 숫자를 틀린 건 영업인데 왜 항상 전략에서 바둥거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업무 분장이란 그런 것이다. 전략처가 기획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기조실 산하 부서인 이상 회의 주관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회의만 마무리하면 여유로운 모습으로 신입 두 분을 맞이할 수 있다. 오후부터 일주일 간 신입사원 도입 연수가 시작된다. 오전 중에 얼굴 보고 간단히 인사만 하고 보내드리면 된다. 정대리는 첫날부터 허덕이는 사수가 되고 싶지 않다. 그분들을 보는 그 순간만이라도 여유로워 보이면 될 일이다. 마음이 바쁘다. 때마침 영업처 이대리가 대형 스테이플러를 찬조한다. 천사가 따로 없다. 이렇게 잘 풀릴 수가, 예감이 좋은 월요일이다. 아니다, 이런 생각은 좋지 않다. 괜찮다고 생각한 날에는 항상 일이 터지니까.


티긱, 티긱, ..., 티긱.


완료. 정대리와 이대리는 회의 자료를 열 부씩 나눠 들고 회의실로 바삐 움직인다. 정대리는 이때 살짝 경쾌함이 올라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굳게 닫힌 회의실 문을 마주하였을 때, 둘의 눈은 삐딱하게 붙은 에이포 용지에 멈췄다. 에이포 용지를 고정한 테이프는 중심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고정력이 있나 싶을 정도로 지문 투성이다. 펄럭이는 용지에서 왠지 모를 중력의 압박이 느껴져 문을 열고 확인할 수 없다. 위태로운 용지의 오른쪽 끝, 깨알 같은 글씨로 인쇄된 짧은 한 줄이 드디어 눈에 들어온다.


'출입금지 긴급회의'


영문 모를 일이다. 정대리와 이대리는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된 건가 싶어 애먼 에이포 용지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누가 인쇄를 이렇게 못하지?' 잡생각이 잠시 올라온다.


"혹시..."/ "뭐, 아는 거..."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은 당혹스러움과 무력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저 뒤에서 정대리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이! 정민이! 18층으로!!"
"!!"

"송보강 과장님?"


정대리는 직감했다. 무언가 놓쳤다. 회의실이 바뀌었다. 이미 8시 40분이다. 엘리베이터는 안된다. 비상계단도 멀다. 늦었다. 테이블 세팅은 불가능하다. 마이크는 이미 19층 회의실에 전부 넣어뒀다. 18층 회의실은 인터넷이 안 된다. 쓰지도 못할 PPT 자료 독촉은 왜 했을까. 무엇보다 19층 회의실에 들어가 있는 내 노트북은 어떻게 빼오지? 내달려 도착한 18층에는 이미 각 처장들이 회의 자료도 없이 잔뜩 찌푸린 눈으로 중앙 천장을 응시하며 앉아있었다.


"송과장아 너는 어째 애가. 에휴... 쯧."


정대리는 에어컨을 연결하려 데스크 정중앙에 까치발을 딛고 올라서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송과장의 모습이 보기 싫다. 정대리 본인도 앞머리가 땀에 젖어 물미역이 되어버렸다. 새로 산 향수 냄새를 뚫고 땀냄새가 올라온다. 10월 말이 이렇게 덥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날씨가 잘못한 거다. 넋이 나가 주위를 살피다 다른 처장들과 조금 떨어져 않은 감사실장과 눈이 마주친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눈을 피하게 되는 사람이다. 기분 나쁘다.

정대리는 이 상황이 억울하다. 화가 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한두 번인가, 담배팸들끼리 제멋대로 진행한 무언가를 또 공유받지 못한 거겠지. 일상이 되어버린 일요 출근이 새삼스레 억울하고 원통하다. PPT도 없이 형식적인 회의가 진행된다. 사장과 주요 처장들이 19층 긴급회의에 들어가 있는 탓에 18층 회의는 의미 없는 회의가 되어버렸다. 어? 잠깐, 그런데 왜 감사실장이 여기에? 아니다. 됐다. 이미 당할 대로 당한 정대리다. 그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날 가장 당혹스러운 사람은 들고 있던 열 부의 회의 자료를 순식간에 정대리에게 스틸당한 채로 홀로 19층 회의실 앞에 멀뚱히 남은 영업처 이대리였다.




2019년 10월 28일 월요일 맑음 뒤 흐림


<영업처 이대리> 저긴 뭐하는 부서지?

회의 자료 때문에 7시 반에 출근했다. 또 정대리 혼자 뛰어다니고 있다. 어제도 밤 9시까지 일하고 있었는데. 나야 일요일에 마감 수치를 뽑는 게 일이지만 정대리는 왜 항상 일요일에 나오는 걸까? 회의 자료는 금요일이 마감이다. 뭐, 제대로 받지는 못했겠지만.


대체 저 부서는 뭐 하는 부서지? 지금은 기획조정실에 전략처, 재무처, 인사처가 있다. 조직개편 전에는 기획부문, 전략부문, 재무부문이 있었다. 인물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기획이니, 전략이니 하는 팀들은 뭘 하는 건지 감이 잘 안 온다.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도통 모르겠는 부서다.


정해진 루틴은 없는 것 같은데 승진이 빠르고, 성과금도 가장 많이 받는다. 윗사람들은 이 판에 고인 물들이고 아랫사람들은 스펙이 좋다. 정대리가 올 때 강처장이 현장에 배치된 신입들의 이력을 죄다 뒤졌다고 한다. 그중 명문대생들만 여섯을 추려 본사가 있는 서울이 연고지인 애들 중 가장 근성 있어 보이는 놈을 데려온다고 했다.


해병대 출신 고대생을 제치고 여자인 정대리가 낙점된 것이 의문이었지만 소문에는 여의도 갈 때 남자들만 가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가 필요하단다. 뭐, 그만큼 예민하게 일한다는 거겠지. 자기는 여자랑 일 못한다고 해병대를 데려와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던 송과장은 정대리가 오기 전 날 정대리 책상을 닦고 노트북을 손수 설치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정대리는 저 부서에서 소중한 사람이다. 나는 정대리의 특별? 아니, 특수함을 차장님과의 첫 배틀에서 알아봤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웃으며 인사하는 얼굴 뒤에 서늘한 것을 감추고 있다. 저 사람은 언젠가 송과장을 잡아먹는다. 차장은 송과장이 먼저겠지만 1급은 정대리가 먼저 달지도 모른다.


<전략처 송과장> ...

처장님이 이상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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