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의 시작은 일요일
2019년 10월 27일
'하아, 씨.'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기계적으로 폰트를 통일하고 표준어 규정을 체크한다.
"띄어쓰기 정도는 합시다. 아저씌드을!"
정대리는 오늘도 일요일의 공기 친구에게 짜증을 부려본다. 각 처에서 보내온 회의 자료는 매주 일요일 정대리의 손에서 재탄생한다. 월요일 회의를 위해 휴일을 반납한 지 벌써 3년. 회의 자료 취합은 치킨집 사장님이 된 신대리가 퇴사하면서 정대리에게로 넘어온 업무였다. 신대리는 퇴사 한 달 전, 순진했던 주임 시절의 정대리를 맞이하여 아빠와도 같은 푸근한 선배를 연기했다. 정대리는 그땐 미처 몰랐다. 회의 자료 취합이 이리도 거대한 똥일 줄은. 업무는 별 거 아니라며 커피도 사주고, 회사 사람들 얘기도 해주는 신대리가 사수여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입 올 때까지만 잠깐만 회의를 맡아달라던 송과장은 아마 그 후로 2년 동안 들어올 모든 신입이 도망칠 줄은 몰랐겠지. 아니, 알았겠지. 그보다 정대리조차 그땐 신입이었으니 전략에서 신입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회의를 맡는 것은 당연했다. 정대리는 언젠가 이직을 한다면 기획이나 전략이 아니라, 출판사 편집 부서가 제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후 6시. 동사의 명사화로 고민없이 작성된 지저분한 어미들을 명확한 명사로 바꾸고 나니 딱 좋은 시간이다. 문장이 간결해지며 내용이 어긋나지 않았는지 각 사업 부서를 뛰어다니며 크로스체크까지 마쳤다. 이제 영업과 재무의 회의 자료만이 남았다. 분명 이번에도 같은 주제에 다른 수치가 적혀 있을 것이다. 두 부서는 통계를 내는 기준이 다르다. 숫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대리였다. 그는 이미 여러차례 못 볼 꼴을 보았다. 기준일이 다른 것인지, 기준 영점이 다른 것인지, 추출 방식이 다른 것인지 알아내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냉담한 내침이었다.
처음 회의 자료를 맡았을 때 정대리는 2년 차 주임이었다. 입사 후 1년은 현장 발령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신입이나 마찬가지였다. 재무처야 같은 기조실밥 먹는 사이니 비벼본다 쳐도 영업처는 이제 막 발령받은 신입사원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상대였다. 영업의 모든 숫자는 한차장으로부터 나오는데, 자기 일만으로도 허덕이는 영업처 차장에게 다른 처 주관의 회의 자료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영업을 중시했던 당시 기조 때문인지 한차장은 회의 당일에 새로운 자료를 들고 회의장에 들어오는 일도 잦았다. 일개 주임이었던 정대리는 매주 금요일 밤이면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영업처 회의 자료를 받으러, 험한 말을 들으러 한차장에게로 가야만 했다. 신대리는 정주임에게 이러한 마찰에 대해 알려준 적이 없었다.
"야, 니가 무슨 사채업자냐? 매주 꼬박꼬박 뭘 받으러 와, 오기는. 메일 봤어. 봤다고. 봤는데 시간이 없는데 어쩌라고. 지금 여기 난장판인 거 안 보여! 일 할 줄 아는 놈들이 하나도 없어, 시*."
무릎에 컵라면과 김밥을 펼쳐놓고 허기진 배를 달래고 있던 영업처 사원들의 눈이 일제히 정주임과 한 차장을 향한다. 한차장은 마른 배 때문에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신경질적으로 휘감아 잡아 올리며 정주임 쪽으로 다가섰다.
"야, 너 몇 살이냐? 아오 씨, 까놓고 말해서 전략에 그런 거 까지 알려줘야 돼? 우리가 뽑아준 자료로 취합만 하는 주제에. 꼴에 시행 부서라고."
"주실 때까지 못 가요."
"하, 참. 너도 뭐, 기조실이다 이거야? 주임 새*가 기조실 뽕이 아주 머리 끝까지 차셨어요오?"
어린 정주임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되려 '건드려라. 건드려봐라. 아예 한 대 쳐라. 나도 더는 못 해 먹겠다.'라고 되뇌며 한차장의 화를 돋우려 멍청한 눈을 하고 온몸에 힘을 풀고 서있었다. 현장에서 익힌 사람 대하는 기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기, 민이씨, 내가 해서 보낼게. 늦어서 미안해요. 차장님 바쁘시니까......"
영업처 이대리는 그때부터 사람이 착했다. 갑작스레 끼어든 상냥함에 살짝 전의를 상실한 정주임은 또렷한 눈으로 돌아왔다. 한차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머리끈을 당겨 풀어낸다. 흔들림 없이 제 방에서 머리를 만지듯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고쳐 메고 양손으로 옆머리를 눌러 잔머리를 붙인다. 강건한 통굽 로퍼 때문인지 마치 바닥에 꽂혀있는 사람처럼 우뚝 솟아 보인다. 살짝 보이는 발목 사이로 펄럭이는 낮은 채도의 반나팔 슬랙스가 공기의 흐름을 정주임 쪽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흐름의 변화는 신경쇠약에 걸린 듯 마른 몸을 가진 한차장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이대리님, 저 24시 13분 차 꼭 타야 합니다. 놓치면 오늘도 회사에서 자야 돼요. 아빠가 걱정하세요. 여분 팬티도 없고, 팬티 살 돈은 더 없어요. 1층 편의점은 비싸니까요."
시선은 한차장에게 고정한 채로 태연히 내뱉는 애잔한 사연이 당당한 모습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구질구질한 사연이었지만 명확한 딕션 때문이었을까. 그 날 정주임은 비루하지만 비참하지는 않은 사람으로 영업처에 각인되었다.
"저거 완전 또라이네."
들으라는 듯이 공중에 흘리는 한차장의 혼잣말을 한 자 한 자 뒤통수에 새긴 정주임은 그날 영업처 이대리라는 사람을 얻었다. 그리고 가급적 재무처의 숫자를 우선시하게 되었다. 굳이 그 일 때문이 아니라도 회의 중에 재무처가 깨지면 기조실이 깨지는 것이다. 전략처는 기조실이다. 고로 재무처가 깨지면 전략처도 깨진다. 영업처의 숫자는 확인하지 않는다. 쓰루하기로 한다.
'아, 이번에 영업처장님 출장으로 한차장이 회의 들어간다는데 별표 별첨을 붙여버릴까? 크으.'
기획조정실 전략처 정민 대리는 회의를 주관하는 자. 이 순간만큼은 사장의 비수를 누구에게 꽂을지 결정하는 절대자다.
그 날 그 자리에는 또 한 명의 전략처 사람이 있었다. 티에프 일로 영업처장 자리에서 조용히 회의 중이었던 송과장은 몸을 낮추고 정주임의 전투 실황을 듣고 있었다. 정주임의 통굽 소리가 멀어지자 그 작고 육중한 몸을 일으켜 이대리와 대치 중인 한차장에게로 향했다. 작은 키의 두 사람이었지만 육중함으로 압도하는 송과장이다. 사람이 저렇게 느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천천히 뒤뚱거리며 한차장 앞으로 걸어간 송과장은 굽은 목을 펴 애매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동그란 안경알에 비친 싯누런 눈동자가 한 바퀴 휙 돈다.
"영업은...응? 예나... 지금이나...응? 직제도 모르고?
기조실. 막내가. 니들보다. 위여."
송과장은 아주 느리게 한차장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트는 듯하더니 또 다른 어딘가를 응시한다.
"꼬우면. 응? 그쪽. 처장한테. 물어보고."
"..."
송과장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미 주변 공기가 멈춘 듯했었다. 정대리가 흐름을 바꾸는 사람이라면 송과장은 멈추는 사람이다. 그 강력한 멈춤은 그 자리에 있었던 영업처장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렇게 전략처로 돌아온 송과장은 말끔한 모습의 정주임을 호되게 혼내는 것이었다.
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맑음
<전략처 정대리> 새 식구 맞이
기분 좋은 일요일이다. 점심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나니 삶의 질이 대폭 상승한 기분이다. 요거트로 상큼하게 시작하는 아침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일은 신입사원이 두 분 오신다. 처장님은 외부 메일로 신상명세 보내신다더니 감감무소식이다. 어차피 회의 자료 마감하려면 오후 9시는 되어야 할 텐데 천천히 기다려보자. 내 옆자리에는 박주임이 쓰던 노트북이 있고, 맞은편에는 선이 없는데 월요일에 IT에 연락하면 목... 아니, 금요일에는 쓸 수 있겠지. 신입 연수가 금요일에 끝나니까 딱이네.
과장님은 키워 보라시지만 내가 뭐라고 누굴 키워?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업무 분장 재편되면 일이 좀 줄려나. 면허나 사심위는 줄 수가 없고, 일단은 회의 자료랑 통계를 넘겨야겠다. 결국 사심위까지 내가 하게 되는구나. 박주임이 버리고 간 심의 전 사업 중 세 개가 영업인데. 이 달 안으로 두 개만 우선 하자. 한차장 건 뒤로 미루고. 과장님은 대체 뭘 하는 거지? 이렇게 바쁜데.
<전략처 송과장> ...
처장님이 이상하다.
마누라도 이상하다.
정대리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