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이 정도면. 잘 나왔고."
송과장의 오케이로 꼬박 두 달을 갈아 넣은 사록이 끝났다. 이제 정대리의 목을 죄던 올가미를 벗겨줄 공문만 발송하면 디엔드다. 리드미컬한 정대리의 손놀림을 따라 공문이 작성된다. '액세스공사 4개년 사록 출간 알림'. 수신자 각 처, 실, 지방본부 체크, 전략처-9865 체크, 발신자 전략처 과장 송보강 체크, 처장인 체크, 줄간 체크, 자간 체크, 오타 체크, 첨부파일 체크.
"감사실, 지방 본부는 빼고"
"넵."
"이건 정민이 니 꺼여. 발신 정민이로 하고. 수고했고."
"아, 네엣."
정대리는 내 이름으로 발송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심혈을 기울여 제작할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발신자를 바꾸고, 수신자에서 감사실과 지방 본부를 제외한다. 모든 것이 평상시와 같다. 자연스러웠다. 이제 됐다. 정말 끝이다. 빠른 전결.
'그나저나 구천팔백육십오라니. 아직 10월인데 무슨 공문 시행을 이렇게 많이 했지.' 정대리는 소소한 감상과 함께 오른손으로 발송 버튼을 누르며 왼손으로 각 처 순둥 포인트들에게 알림 전화를 돌린다.
"안녕하십니까, 19층 귀염둥이 전략처 정.민.입니닷. 우리 모두가 증오해 마지않던 사록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실물 배달은 딜리버리 정이 직접 갑니다. 받자마자 불태워주십쇼! "
"어후, 고생했어요. 석유랑 라이터 준비하면 돼요? 뭐, 혹시 누구 찌를 식칼 같은 거 필요해요?"
이대리님은 천사다.
"온니~ 고생했쪄요. 공문은 벌써 접수했지! 직접 올 거야? 언제 올 거야? 나 지금 젤리 많아."
지아 주임은 사랑이다.
"실물 돌리고 오겠습니다."
"옹냐, 감사실은 빼고."
"네."
정대리는 영업처 이대리가 빌려준 대형 카트에 오백 장 짜리 사록을 열 부 실었다. 한 부를 빼서 캐비닛 위에 똑바로 놓고 결과 보고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다. 탄탄한 가죽 커버에 둘러싸인 출판물은 휴대폰 화면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정대리는 자석을 박아 마감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사진 촬영을 하던 백서 한 권을 슬그머니 뒤집어 개인 캐비닛에 넣는다. 감정 없는 지긋지긋함 속에서 피어난 애착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남은 사록 스무 부는 박스에서 꺼내 비닐을 둘러 전략처 캐비닛으로. 이제 정 딜리버리가 19층을 돈다. 그렇게 모든 부서의 공용 캐비닛 맨 아랫칸 어딘가에 정대리의 피와 땀이 공식적으로 내팽개쳐지고 있었다.
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맑음
<신입1>
교육 2일 차다. 첫날에는 실망이 컸는데 19층 대강당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는 그럭저럭 괜찮다. 일부러 한 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을 가며 사무실을 살피고 있다. 나는 전략처로 발령날 예정이라는데 화장실 가는 길에는 전략처가 없다. 어디에 있는 거지? 막 숨어서 전략 짜고 그러나?
현장으로 가는 친구들은 여덟 명이다. 걔들은 동기가 많아서 좋을 것 같다. 발령받고 나면 자주 못 볼 것 같아서 아쉽다. 내일도 같이 앉아야겠다. 나보다 어린데 다들 자격증이 있었다. 기특한 아이들이다. 동생들이 잘 되면 이런 기분일까? 내가 괜히 뿌듯하다.
그리고 오늘 전략처 선배를 한 명 봤다. 165 정도 되는 키에 마른 여자였다. 이 회사 여자들은 전체적으로 마른 것 같다. 잘 웃고 착해 보였다. 4개년 사록을 나눠주고 훌쩍 떠났다. 사록은 엄청 두껍고 무겁다. 1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책에서 풍기는 냄새가 좋다. 비누 냄샌가? 아닌가? 가죽 냄샌가?
<신입2>
사회공헌처 하나, 인사 하나, 재무 하나. 열다섯 중 사무실 오른쪽으로 발령받는 사람은 나까지 다섯. 조심스러운 성격들에 30대도 드문드문 섞여있다. 그 외 영업이 둘, 나머지는 현장. 이틀째부터 자연스럽게 사무실 오른쪽, 왼쪽으로 나누어 앉고 있다. 더 자주 볼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인지상정이지.
오늘은 대리님을 뵈었다. 전략처에 몇 분의 대리님이 계신지는 모르나 책 배달을 오셨으니 아마도 막내 대리님일 것이다. 흑발, 흰 피부, 끝부분에만 씨컬이 살짝 걸린 생머리, 볼륨 없이 옆으로 흐르는 긴 앞머리, 구태여 가린 넓은 이마, 선명한 눈썹, 또렷하게 가늘고 긴 눈, 작은 코와 입, 각이 보이는 턱, 적당한 화장, 채도 낮은 파스텔 그린 블라우스, 밝은 베이지 슬랙스, 와인블랙 로퍼. 소매와 바짓단까지 신경 쓴 차림새.
단정한 사람이었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완벽을 둘러쓰고 있는데 사람 자체는 순해 보였다. 그리고, 향기. 정민 대리님은 자기만의 향을 가진 사람이다. 정민이라는 사람을 아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 향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비슷한 향에 도전하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부서인 걸까. 개인의 성격일지도 모른다. 아직 판단하기엔 이르다. 퇴근 후 사록을 펼쳐 사진만 쭉 훑어보았다. 곧 퇴진한다는 사장 사진이 가득하다. 이건 가는 사람에게 예를 갖추는 책이다. 사진으로 추측 건데 처장님들은 대체로 50대 중후반이고, 그중 가장 작고 까만 사람, 중앙에 서있는 사람이 전략처장이다.
<감사실 이주임> 신입 중에 이상한 애가 하나 있다
신입이 인사를 안 한다? 기가 막히네 정말. 내가 입사했을 때도 우리 기수 인사 안 한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 혹시 내가 꼰대가 된 건가? 첫날부터 유독 눈에 거슬리는 놈이 하나 있다. 선배를 보고 인사도 없이 베실베실. 비서님 여기 물 10잔요, 비서님 여기 더운데요. 비서님 강사님 안 오시나요, 비서님... 말끝마다 비서님 비서님, 미친놈인가 싶다. 분명 명패에 주임이라고 쓰여있는데 그 새*만 유독 주임님이 아니라 비서님.
아무리 회사 돌아가는 걸 모른다고 해도 인간이면 눈치라는 게 있지 않나? 동기들이 다 주임님, 선배님이라고 부르는데 왜 비서님이래? 지가 사장이야, 실장이야, 처장이야 뭐야. 뭐래 진짜... 아 , 열 받아. 혹시 눈이 나쁜가? 아니면 내가 그놈한테 뭘 잘못했나? 아니야. 이건 그냥 내가 우스운 거지. 그 새* 이름이 최유빈. 너 이 새* 내가 지켜본다.
다음에 19층 가면 민이 언니한테 신입 중에 이상한 놈 있다고 조심하라고 말해줘야겠다. 저거 어디지? 영업인가? 마케팅? 홍보? 못생겨가지고 바짓단 껑충한 게 중딩이야 뭐야. 저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나? 부끄럽지도 않나봐. 자기 전에 저주하고 자야지. 망해라 최유빈이 너 이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