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리와 최유빈

2019년 11월 1일

by 선량한해달

"어얼, 정대리님 오늘 여유로운데?"

"그쵸? 이번 주는 여유 한 번 부려 보려고요."


영업처 이대리는 금요일 오후 5시에 여유로운 정대리를 처음 본다. 분명 오전에 회의 자료 제출 안내 메일을 받았는데 혹시라도 내가 요일을 착각했나 싶어 핸드폰과 노트북 날짜까지 재차 확인했다. 정대리는 오늘만큼은 여유롭고 싶었다. 마침 사록도 끝났고 정치 싸움으로 사장 교체가 늦어지며 신임 사장 업무보고 작성에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주 업무가 바쁜 와중에 끼어드는 회의 자료는 재난 상황을 만들어냈었지만 주 업무가 없는 와중에 끼어드는 회의 자료는 딱 좋은 긴장감을 주는 잘 만들어진 유니폼 같은 것이다.


"끝날 때가 됐는데..."


정대리는 도입 연수를 마치고 각 부서에 배치될 신입사원들을 빨리 보고 싶었다. 강처장이 외부 메일로 보내 놓겠다던 신입사원 신상명세는 결국 도착하지 않았다. 사록 배달 갔을 때 언뜻 신입사원들을 보기는 했지만 누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오늘 아침 인사발령 공문을 접수하면서 전략처로 발령받은 두 신입사원의 이름을 처음 접한 정대리는 입사 이래 가장 기뻤다.


'강미리, 최유빈.'


"두 분 다 여자였어?!"


무의식 중에 처장님의 '두 놈'이라는 표현에 사로잡혀 있었던 정대리는 내가 이렇게 편견이 심한 사람이었구나 반성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을 지나 정수기 앞까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렇게 단번에 성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될 줄이야. 정대리가 전략처로 발령받은 첫날 송과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서 간 사적 교류 차단이었다.


"현장 사람들 만나는 거, 응? 여자들끼리 몰려다는 거, 응? 보기 안 좋고. 그니까 하지 말고."


이 때문에 정대리는 친구가 없었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을 쳐내지는 않았지만 정대리 쪽에서 먼저 친구로 다가갈 입장은 못 되었던 것이다. 같이 본사로 발령받았던 지아 주임은 당시 배속되었던 감사실이 한 층 아래인 18층에 있었던 이유로 송과장의 눈을 피해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외에 친구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다가왔던 영업처 이대리 정도다.


정대리는 이제 담배 타임에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된다. 안 따라나가면 정보 소실, 따라나가면 생명 소실. 애써 게임이나 군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수많은 스포츠 시즌의 묘한 들뜸을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 정수기까지의 반복 산책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정대리 옆에서 아닌 척하며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송과장 역시 때때로 파티션 위로 굽은 목을 휘어가며 대강당 쪽 복도를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공기의 어수선함이 감지된다. 저 먼 곳으로부터 둥둥둥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검은 무리가 복도 끝에 나타난다. 어색한 모델 워킹을 하며 신입 떼가 걸어온다. 반 정도가 저 끝에서 어딘가로 휘어 빠져 나간다. 현장 인원이다. 잠시 후 건장하고 훤칠한 남자 둘이 영업으로 갈라져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공 하나, 재무 하나. 이제 남은 건 전략 둘.


가장 먼 걸음을 걸어 전략처 앞에 도착한 신입사원은 예상대로 두 명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정대리의 예상과는 달리 무척 커다랗고 시커먼 '놈'이었다.




2019년 11월 1일 금요일 맒음


<전략처 최사원> 내 자리가 생겼다

드디어 발령이 났다. 발령 공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부서 변동이 있을 수 있다고 해서 어디로 갈지 걱정이었는데 그대로 전략처였다.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나니 진짜 시작이구나 싶었다. 교육 둘째 날에 기조실장님이 들어오셔서 특히 나와 미리 누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씀하셨다.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자.


전략처는 대강당 반대편에 있었다. 책 배달 오신 분은 대리님이었다. 책에서 나던 냄새가 이 분 향수 냄새였다. 송보강 과장님은 말이 없고 잘 안 웃는다. 아직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대리님은 착한 사람인 것 같다. 앞으로 많이 물어봐야겠다. 미리 누나 자리가 대리님 옆이고, 내 자리는 미리 누나 맞은편이다. 대리님과 미리 누나는 벌써 친해진 것 같다. 여자들은 참 빨리 친해진다.


처장님이 출장 중이라 월요일에 회식 겸 환영회를 한단다. 영업 친구들은 오늘 회식을 한다는데 분위기를 좀 물어봐야겠다. 다들 단톡을 잘 안 보네... 건배사랑 노래도 시키려나? 나도 이제 진짜로 사회생활이라는 걸 하는구나. 걱정된다. 메뉴는 고기나 치킨이면 좋겠는데.


<전략처 강사원> 노트북을 열어봤어야 했는데

ㆍ교육 1일 차: 근로계약, 사규집, 취업규칙(인사처)

ㆍ교육 2일 차: 회사경영전반(기조실장) → 전략처장 부재로 기조실장 대체, 시험(형식적)

-교재3+사록, 비전 & 슬로건, 인생 잡설

ㆍ교육 3일 차: 수익구조, 비용(재무처장) → 시험(20문항 각 5점, 60점 미만 과락자 재시)

ㆍ교육 4일 차: 경평, 처별주무부처(사공처장) → 시험(처별 별도 시험, 객관식20/ 주관식5)

ㆍ교육 5일 차: R&D, 신사업(미기연실장) → 시험(논술)


+외부강사: MBTI, DISC, 청렴&윤리, 심리&명상, 도미노 등 팀워크 게임 (최유빈 사원과 상극)


교육을 마치고 전략처로 이동했다. 정민 대리님께서 재무처 앞까지 마중 나오셨다. 최사원 자리는 인터넷 연결 전이었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내 자리에는 이미 노트북이 연결되어 있었다. 대리님은 조금 긴장하신 것 같았고 과장님은 뒷짐을 지고 일어서 계셨다. 다음 주 월요일에 환영회 겸 회식을 하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라고 하셨다. 과장님은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첫날 신입사원들이 모였던 소회의실로 들어가셨다.


6시가 되자 어서 들어가라며 대리님께서 가방까지 들고 배웅을 나오셨다. 노트북을 열어 뭐라도 보고 싶었는데 대리님의 호의를 뿌리칠 수 없어 그대로 나왔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회식 장소로 향하는 영업 동기들과 함께 하행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시 퇴근을 했다. 아마 오늘이 기록적인 정시 퇴근이 되지 않을까.


<전략처 정대리> 나는 진짜 나쁜 사람이다

최사원은 남자였다. 이름만 보고 성별을 판단한 내가 나쁘다. 편견이 또 한 건 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자리를 안내한 것 같은데 눈치챘으려나? IT에서도 한 건 해줬다. 월요일에 신청했건만 아직도 선을 안 따줬다. 신청서까지 발송했는데... 순둥 포인트로 전화해보고 안 되면 공문플레이 해야겠다. 덕분에 최사원은 당분간 멀뚱이 파티션만 바라보고 있게 생겼다. 처장님은 세종 일정이 길어져 내일 오후에 복귀하시게 됐다. 첫 회식은 월요일이다.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 과장님이 친히 나서 처장님 좋아하시는 오리고깃집을 예약해두셨다. 신입사원들이 와서 내심 기쁘신 건가?


<전략처 송과장> ...

두 놈 중 한 놈은. 묘하게 낯이 익고. 처장님 말대로다. 오묘하니.


<비서실 이주임> 그놈이 전략이었어?

우리 민이 언니한테도 그러면 내가 사적으로 응징하겠어. 최유빈이 너 이 새*


<14기 신입 단톡방(15)>

(전략 최유빈)

동기 여러분 보고 싶어요.. 모두 오늘 회식이려나?

우린 내일인데 회식 분위기 공유해주심 감사 ₂


(사공 윤인혜)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₂


(중부본부 김두희)

행님 이거보면 갠톡 ㄱㄱ ₃


(재무 엄유미)

회식 갑니다. 모두 죠은밤~ ₄


(인사 김규빈)

ㅈㅂ~ 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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