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2019년 11월 6일

by 선량한해달

"대리님, 오늘은 처장님 나오시나요?"

"세종에 가시면 며칠씩 못 오기도 하세요. 일이 워낙 돌발적이라서요."


당차게 얼버무렸지만 정대리는 살짝 불안하다. 월요일에 환영회 겸 회식을 하자던 강처장이 수요일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세종이나 여의도에서 무슨 급한 일이 생기셨겠지 하고 넘기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어제부터 송과장도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오전 9시가 넘어 송과장에게 카톡을 보내봤지만 소용없었다. 10시가 넘어가고 있는 지금까지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틀간 사록과 업무 보고를 무한히 반복하여 읽고 있는 신입들의 옆모습이 짠하다. 이내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래가 생겼다는 것은 위아래로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야~ 정대리님, 여기도 어린이날이네!"

"어머, 이대리님, 어디 가세요?"

"우리도 오늘 어린이날이거든요. 신입들이랑 해장 컵라면 하러 가요."


어제도 달렸구나. 역시 영업이다. 역시 이대리다. 정대리도 저렇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정대리는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세 남자를 보며 마음속에 무언가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잠재웠다. 전략처는 그럴 수가 없다. 바로 뒤에 실장실이 있다. 전략처 뒤 깊은 복도 끝 작은 방에는 정년을 앞둔 기조실장이 버티고 있다. 때가 되면 왔다 가는 무의미한 사장을 압도하는 사실상 일인자. 정대리는 혹시라도 실장님이 실 밖으로 나오셨는데 때마침 전략처가 전부 비어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소름이 돋는다. 딴짓을 해도 자리를 지키며 해야 한다.


"유미씨, 우리 담배 좀 태우고 올게."


재무처의 담배 타임에 유독 몸이 힘들어 보이는 엄사원이 혼자라도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니 전략처 옆 재무처도 상황은 같다. 역시 오른쪽 팸이다. 정대리는 자리를 지키며 어린이날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했다.

"우리, 회사 공부 좀 해볼까요?"


전략처장 자리 옆의 큰 테이블에 정대리와 두 사원이 둘러앉는다. 누가 봐도 회의 중인 전략처의 모습이다. 정대리는 에이쓰리 사이즈로 인쇄한 조직도를 보란 듯이 중앙에 펼친다. 그 옆에는 의미 없는 보고서들을 쌓고는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긋한다.


"우리 처는 위치가 실장님 바로 앞이라 빈자리를 보이면 안 돼요. 처장님과 과장님이 자리를 비우실 때는 더요. 재무처가 저렇게 우르르 나갔다가 여러 번 사단이 났었어요. 그나마 이제 엄사원이 계셔서 다행이긴 한데, 저 타이밍에 기조실장님이 나오셔서 다들 어디 갔냐고 물어보시면 정말 난처해요."


정대리의 실질적인 신입 연수가 시작됐다. 두 신입 사원의 눈이 반짝인다.


"사람들이 우리 처장님을 서울특별시 경상동 출신이라고 해요. 경상도말 하시다가 서울말 하시다가 하거든요. 저는 그 말투가 신경 쓰여서 내용을 놓친 적이 있어요. 과장님은 충청도 분이세요. 말이 좀 느리시고, 그렇고오~응? 저렇고오~응? 하는 말버릇이 있으세요."

"저 그거 들어봤슴다. 하하."

"벌써요?"

"첫날에 과장님이 소회의실에서 주무시고 계셨는데 제가 문 열고 들어갔거든요."

"저런..., 첫날부터 그 모습을 보셨구나... ."

정대리는 전략처의 실상을 들켜버린 것 같아 약간 부끄러웠지만 환상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전략처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박주임처럼 세 달만에 도망치면 곤란하다. 이 '두 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래야 정대리 본인이 산다.


"이게 새 조직도예요. 여기. 미리님, 유빈님도 들어가 있죠? 얼굴 아래 내선 번호 참고하시고요. 우리는 전화받을 때 '행복한 미래와 함께합니다.'라고 인사를 해요. 그 뒤에 '전략처 000입니다.'라고 하시면 돼요. 전화를 돌릴 때는 돌리기 버튼 누르고 내선 번호, 걸 때는 그냥 내선 번호만 누르시고요."


정대리는 두 사람을 데리고 자리로 돌아가 전화를 거는 연습을 시작한다. 3년 전 처음 전략처로 왔을 때 전화를 못 받아서 당황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수였던 신대리는 회사 사정이나 소문, 사람 사이의 관계는 곧잘 얘기해줬지만 생활 면에서의 디테일을 알려줄 정도로 세심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디테일은 최사원에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강사원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온 정대리는 이번에는 인쇄한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준다.


"원래는 처장님, 과장님 오시면 지시하시는 대로 업무 분장받고 인수인계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틀이나 지나면 안 될 것 같아서 기본 사항들만 대충 정리해봤어요."


간결하고 확실한 문장으로 각종 시설의 위치와 시간, 전략처의 루틴, 강처장과 송과장의 고정 일정들이 적혀있다. 그리고 가장 아랫줄에는 조금 전 설명한 전화받기 등 사무실 생활의 소소한 팁이 적혀있다.


"뒷면 한 번 보실래요?"


두 신입은 일제히 용지를 뒤집는다. 소속, 직위, 이름, 연락처 순으로 이십여 명의 연락처가 연필로 흐릿하게 적혀있다.


"휴대폰에 저장하시고 지우세요. 아직 감이 안 오실 수 있지만 우리 처의 일은 결국 최종 보고예요. 그게 사장님이든, 기재부든, 국토부든, 서울시든, 청와대든. 다른 처에서 나온 자료들을 하나하나 이해해서 처음 본 사람도 알 수 있을만한 활자로 글을 쓰는 게 전략처 일이에요. 때때로 애매하게 써야 할 때도 있지만요. 물론 거짓을 쓰라는 소리는 아니고요. 사실을 기반으로 글의 뉘앙스를 바꾸는 거예요. 거기 적힌 분들은 각 처에서 협조 잘해주시는 분들만 따로 정리해둔 거예요.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최사원은 이때 '전략처'의 일에 대해 처음으로 알았다. '글을 쓰는 부서구나.' 하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다. 최사원은 사원 모두가 하나인데 어느 부서든 보고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협조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위한 보고서를 쓰는데 협조를 안 해주기도 하나요?"

"그렇죠, 다 자기 일에 치이니까요."

"우리는 이게 일이라면서요."

"네, 맞아요. 그래서 참 골치 아파요. 신기하죠?"


최사원은 여전히 이해가 어렵다.


"어떻게 그래요? 저는 누가 보고서 쓴다고 하면 제가 가진 자료 다 줄 것 같은데."


정대리는 최사원의 이해를 도울만한 좋은 예시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만약 같은 전공 수업을 듣는데 제가 다음 주 발표자라고 쳐봐요. A+는 한 팀에게만 간다고 가정하고요. 유빈님 팀은 지난주에 이미 발표를 마쳤어요. 제가 우리 모두의 학구적 목표를 위해 더 좋은 발표를 할 테니 지난주 발표의 밑자료를 달라고 하면 유빈님은 당연히 협조해 주시겠어요?"

"그건 학교고. 여긴 직장이잖아요."

"네. 여긴 직장이라 A+ 대신 연말 성과급 200%냐, 0%냐를 두고 싸우죠."




2019년 11월 6일 수요일 맑음


<전략처 정대리> 좋을 때다

유빈님을 보고 있으니 신입 때가 떠올랐다. 이해도는 좀 떨어지지만 열정 있고, 순수하고, 풋풋하고. 나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 오늘은 이 사람을 언제 키우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미리님은 아직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확실히 일머리가 있고, 나이도 있으신데 직장 예절을 철저히 지키시고. 전직장이 어디셨을까? 다른 기관? 사기업? 미리님 덕분에 전략처 신입 잘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윗분들이 빨리 오셔야 업무 분장도 조정하고 팀이 돌아갈 텐데 내일은 오신다고 카톡이 오긴 했지만 또 안 오시면 나 혼자 어쩌지? 사심위 준비 때문에 오늘도 겨우 막차를 탔다. 윗분들이 안 계시니 마음이 편해서 좋지만 내일을 모른다는 게 무섭다. 나만 바라보는 사람이 둘이나 생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략처 강사원> 성격인가?

대리님은 후배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챙겨주시는 게 감사하지만 불편하기도 하다. 혹시 내가 나이가 많아서? 오늘은 세세한 것까지 정리된 한 장 짜리 매뉴얼을 주셨다. 그런 걸 주면 역으로 더 부담스러워지는데... 그 정성 담긴 한 장을 받아 드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래도 전략처가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상단에 그래픽줄 긋고 헤드라인, 제목은 신명조. 줄 바꿔 오른쪽 정렬, 소속+이름+괄호 하고 전화모양+내선, 돋움. 대주제 동그라미, 소주제 작대기, 부연 별표. 별표는 돋움. 각 테마 하나씩 들여 쓰기. 모든 내용 한 줄 이내. 명사형 어미. 주제의 중요도와 내용의 길이를 고려한 모양 배치. 귀찮음 포인트가 한두 개가 아니다. 새삼 궁금해진다. 이런 비공식적인 자료까지 굳이 각 잡고 작성할 필요가 있었을까? 부서 성격일까, 개인 성격일까?


<전략처 최사원> 별 거 아닌데?

오늘도 정시 퇴근. 별 일 없이 지났다. 다른 처 동기들은 첫날부터 회식이니 업무 분장이니 말이 많던데 우리는 며칠째 일이 없었다. 전략처가 일 없는 부선가? 친구들 말 들어보면 전략이라는 이름 붙은 데가 제일 힘들다던데 공기업이라 그런가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대리님도 오전 내내 우리 오티 해주신 거 보면 일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전략처 업무를 정리한 종이를 한 장 주셨는데 윗분들 일정은 참고만 하면 되겠고 생각보다 별 거 없다. 월요일 회의, 화요일 업무 보고, 수요일 티에프 회의/ 사심위, 목요일 티에프 업무 보고/ 이사회, 금요일 회의 자료 마감. 크게 회의, 보고, 위원회 정도... 업무 분장은 과장님이 오시면 정해주신다고 하니 내가 뭘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거라고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영업처 이대리> ...

아직 저쪽은 모르나?

<신입 단톡방(15)>

(인사 김규빈)

조직도 미치겠네.. 이거 업무 분장으로 받아서 어째 ₃


(전략 최유빈)

ㅋㅋㅋ 오늘 봤다. 업무 분장이 조직도야? 그런 분장도 있어? 수고했네 ₃


(인사 김규빈)

분장은 복진데 조직도를 복지 담당이 하는거 ₃


(재무 엄유미)

나는 분장이 전표/서무래. 전사 전표 다 치게 생겼네. 미쳤나 진짜. 조직도에서 전표 지워죠 ₃


(인사 김규빈)

이번 분기에 육휴 복직자만 다섯 넘는 거 같은데... 하 우째 진짜.... 퇴사각 ₃


(영업 최단)

그럼 그거 다섯 번 넘게 만들어? ₃


(인사 김규빈)

하.... 과장 주길까? 2주 후에 복직 있대... 이거 야근 꽉 채워서 3일 걸림. 포토샵 미친다 ₄


(전략 최유빈)

그래도 회사에 꼭 필요한 일 하는 거잖아. 머찌구만 머 ₄


(인사 김규빈)

닥쳐 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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