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신입과 그냥 신입(전편)
2019년 11월 7일 오전
"안녕하십니까."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 영혼을 잠재우고 입으로만 외치는 '안녕하십니까'가 줄을 잇는 아침이다. 오랜만에 모든 처의 처장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출근하자마자 전략처 뒤의 깊은 복도로 우르르 모여들어 이내 모습을 감추던 중년의 티에프 무리도 오늘만큼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사원은 신비주의로 일관하던 강처장의 깡마른 비주얼에 적잖이 당황했다.
"두 분, 인사드려요 우리."
정대리는 두 사원과 함께 강처장의 자리로 간다.
"처장님, 여기 신입사원 강... "
"아? 아아! 아이고오 왔어요오. 내가 마이 늦었쬬오? 반가워요. 우리 정대리가 일 잘하니까 많이 배우고. 여기가 강미리, 저쪽이 최유비이. 맞죠."
"신입사원 강미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입. 사원. 최.유.빈. 입니다. 열. 심히. 하겠. 습.니다!"
재무처 사람들까지 깜짝 놀라 고개를 들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붉어진 얼굴의 정대리는 강처장이 드러내는 모양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사원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 깊은 반성 중이다. 이것이 오늘의 첫 번째 정적이었다.
"좋고오, 패기 있고, 응?"
정적을 깨고 송과장이 등장한다. 정대리는 지긋지긋한 저 말투가 안도감을 준다는 사실이 경멸스럽다.
"어어, 여이 송과장 왔네. 좋은 신입 두 분이나 오셨으니까 송과장이랑 정대리랑 해갖고 잘 키워봐요. 강미리, 최유비이, 잘 들어요. 두 사람 앞으로 힘들다이. 전략처 쉬운데 아이그든. 알지요? 적응 잘 하고. 도망칠 거면 빨리 가래이. 여 다 익숙하다. 농담이고. 수고해요."
최사원은 머쓱한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주변을 살피다가 마주 앉은 강사원과 눈이 마주친다. 그때 강사원 자리 뒤로 강처장이 지나며 한 마디를 툭 던진다.
"그... 미리씨는. 나 봤죠?"
"네?"
"나 본 적 있지요? 어디 공단 있다 왔어요?"
"아, 아닙니다. ㅇㅇ공사에 잠시 있었습니다."
"햐아, 그래에. 어데? 기획인가? 전략? 대외?"
"아..., 아마 새미래 합동 티에프 때 뵈었을 겁니다."
강처장이 짐짓 놀란 눈치다. 대화가 끊기고 무게감을 알 수 없는 공기가 두 강을 감싸고돈다. 두 번째 정적이었다. 첫 번째 것보다 훨씬 강하고 영문 모를 정적이다. 이상함을 감지한 정대리는 중간에 끼어들어야 할지 잠자코 있어야 할지 심한 내적 갈등 중이다. 육중한 송과장이 무의식 중에 정대리 자리 뒤까지 와있었다.
"그, 그래요, 내 어서 봤다니까, 묘오하이 낯이 익어. 송과장, 봐라, 여 경력직이다. 알았어요, 열심히 해요."
강처장은 조금 전 몇 초간의 정적이 없었던 일인 양 호기롭게 웃으며 행선지도 알리지 않은 채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재무와 인사처장이 그 뒤를 따른다.
"다녀오십쇼."
이번에는 영혼 없는 '다녀오십쇼'가 줄을 잇는다. 송과장은 잠시 놨던 정신줄을 다잡고 빠른 속도로 강사원에게 다가간다. 정대리는 자신의 헤드레스트에서 묵직한 족발 같은 팔이 떨어져 나간 것에 감사하며 잠시 간의 공간 침해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자석으로 붙여둔 시향지 하나를 공기 중에 나부낀다.
"새사업 티에프에 있었다고?"
"다섯 달 있었습니다."
"뭐 그래도, 응? 일은 좀 하겠고, 응? ...저기 ...하철 소장님도 알고?"
"모르는 분입니다."
"윤성남 처장님은?"
"모르는 분입니다."
"그래... 5개월이면, 응? 모를 수도 있고, 응?"
느릿느릿 원래의 템포를 되찾은 송과장은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 듯싶더니 언제 가져다 두었는지 책꽂이에서 거무튀튀한 회사 다이어리 두 개를 챙겨 다시 일어선다.
"회의하자."
"넵."
정대리는 두 신입을 서둘러 소회의실로 이동시키며 들뜬 목소리를 애써 낮추어 말한다.
"우리 업무 분장할 것 같아요."
"정대리야, 너 지금 뭐하지?"
"신임 사장 업무보고 초안이랑 사심위 두 건, 내통, 외통 하고 있습니다."
"주은이 누나 꺼 나갔고?"
"마감이 오늘 14신데 영업 빼고 취합 완료됐습니다. 이주무관님 오늘 오전 반차시랍니다."
"잘됐네. 영업은 숫자 또 안 주고, 응? 하아... ."
송과장의 깊은 한숨 속에서 대화의 흐름을 전혀 읽지 못한 최사원은 작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사심위? 내통? 외통? 주은이 누나? 최사원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영업처가 전략처 업무에 비협조적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자리 들어가면 바로, 응? 독촉 메일 보내고, 응?"
"네."
"영업처장 참조 찍고, 응?"
"네."
"오늘부터는 참조에, 응? 여기 두 사람도 넣고, 응? 신입들도 뭐 하는지는 알어야지."
"네."
잠시 대화가 끊기고 송과장이 어색한 손길로 회사 다이어리를 두 신입에게 밀어 전달한다.
"쓰고."
"감사합니다."
"..ㅁ사합니다."
"맨 앞장 펼쳐보고."
"네."
"옙."
최사원의 눈이 회사 다이어리 맨 앞장에 적힌 비전과 미션, 슬로건에 멈춘다. 면접을 준비할 때부터 참으로 촌스럽다고 생각한 단어와 문장이었다.
"최사원은 거 어떻게 생각하는고? 긴장하지 말고, 응? 솔직히."
"딱딱하고 촌스럽습니다."
예상외의 솔직함에 놀람을 넘어선 어떠한 툭 떨어지는 감정에 휩싸여 고개를 든 정대리와 강사원의 눈이 마주친다. 송과장 옆에 앉은 정대리는 맞은편에 앉은 강사원의 눈을 보고 송과장의 표정을 유추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강사원의 놀란 눈은 송과장의 표정까지 담고 있지는 않았다.
"뭐... 그럴 수 있어. 촌스럽지. 막말로 우리가 행복한 미래를 무슨 수로 만들고, 응? 나도 불행한데. 국민과 함께는 뭔 함께고, 응? 마누라도 함께 못 가겠는데, 응? 그 소중한 국민들께서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응? 정대리 안 그래? 하, 차암나."
"그쵸... ."
강사원은 마주앉은 두 상사의 헛웃음을 감지하고는 이 상황이 이렇게나마 풀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의 동기가 회사나 일에 대해 모를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미성숙하며, 사회화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강사원은 최사원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미리씨는?"
"문장이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그런 거 말고, 응? 솔직한 심정을 말해보라고, 응? 여기 유빈씨처럼."
"고민을 많이 한 단어와 문장입니다. 유치원생부터 노인까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도록. 그래서 단조로운 감이 있습니다."
송과장은 리액션을 고민하는 듯 목을 굽어 빼고 허공을 응시한다.
"서른셋이랬나?"
"다섯입니다."
갑자기 정대리에게로 화살이 향한다.
"어이, 정민이."
"네."
"언니라고 부르지 말고, 응? 지킬 건 지키고, 응?"
'아, 저 말은 나한테 하는 소리구나.'
강사원은 순간 내가 너무 나섰나 싶었다. 송과장과는 어쩐지 맞지 않을 것 같다.
'아이씨, 이 아저씨 또 왜 이래, 서로 불편하게.'
정대리는 앞으로 같이 실무에 임할 강사원을 시답잖은 것으로 압박하는 옆자리 중년 게임돌이가 싫다. 그저 빨리 업무 분장을 정하고 싶을 뿐이었다. 다른 처 신입들은 이미 분장을 갖고 실무를 배우고 있는데 전략처만 분장 재편성 없이 목요일을 맞이하지 않았나.
"과장님, 인사에서 조직도 업데이트한다고 바뀐 업무 분장 작성해 달랍니다."
"해주면 되잖어."
"어떻게 할까요?"
"거, 뭐, 어렵나? 두 개밖에 더 있어? 회의하고, 응? 통계하고. 응? 그렇게 주면 되자네? 나머진 얘들이 으뜨케 해? 사심위 시킬거여? 잘도 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5초 만에 업무분장 재편성이 끝났다. 송과장은 이럴 때마다 정대리가 못마땅하다. 이제는 알아서 업무 배분도 하고, 작은 일 정도는 나서서 지휘도 하는 선임 실무자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송과장이 보기에 지나치게 꼼꼼하고 작은 것에 집착하는 정대리의 성격은 전략 일에는 맞지만 사회생활에는 맞지 않는다. 이럴 때면 치고 나가는 맛이 있었던 박주임이 떠오르는 것이다.
"말 편하게 할게요. 응? 그래야 일이 되는거여. 미리, 니가 일 좀 했으니까 통계를 보고. 응? 통계는 숫자를 볼 줄 알어야 돼. 당장 오후에 이주은 주무관 쪽으로 나갈 것도 있고. 응? 숫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어. 그러니까 뺄 거 빼고 내보내고, 응? 정대리가 인수인계해 줄 거니까 물어보고. 새사업에서 반년 일했으면 주무관들이랑 일 해봤을 거고, 응?"
"...아, 네."
강사원은 통계자료 출입 업무를 알고 있다. 이주은 주무관과도 일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단 하나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송과장의 '응?'이었다. 지금 저 사람이 말하는 '응?'이 습관적인 '응'인지 질문을 던지는 '응'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대리에게 말버릇에 대해 들었을 때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이건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부터 강사원은 업무 지시를 받을 때 송과장의 '응'에 집중해야만 한다.
"유빈이, 응? 넌 회의 자료 맡고. 응?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해보면 그 일이 음청 힘든 일이여. 정대리가 워낙 관계를 잘해놔서 괜찮을 거고, 응? 아, 영업은 빼고, 거긴 한차장이 좀 힘들어. 하다 보면 몇 번 현타 올거여. 응?"
"..."
"응??"
"아, 네!"
'응?'에 적응해야 하는 건 최사원도 마찬가지다. 정대리는 자꾸만 웃음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뚫린 귀를 주변 공기의 막으로 최대한 다소곳이 닫고, 고개는 오른쪽 아래 경사 45도로 숙였다. 얼굴을 들면 두 사람의 참혹한 표정에 당하고 말 것이다.
"자, 됐고, 응? 질문?"
질문이 없자 송과장은 잘해보라는 듯 정대리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룩한 앞주머니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며 자리를 뜬다. 벗고 있었던 한쪽 슬리퍼를 발가락으로 휙 돌려 착장 하는 모습이 국가대표 축구선수급이었다.
"엄청 웃기고오, 응?"
최사원은 정대리의 능숙한 성대모사에 이 사람이 사실은 웃긴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며 피식했다. 소회의실에 남은 세 사람은 선생님 흉을 보는 학생들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키득키득 웃는다. 송과장의 '응'에 이미 적응한 자와 앞으로 적응해야 할 자들의 비통한 웃음이었다. 한바탕 웃고 나서 정대리의 인수인계가 시작된다.
"먼저, 미리님은 통계 출입 업무 해보셨나요?"
"네."
"그럼 일이 쉽겠네요. 제가 오늘 아침에 외부 메일로 자료 모둠 발송해뒀거든요? 압축 파일 열어보시면 거기에 지난달에 주무관님 쪽으로 내보낸 자료가 있어요. '191015_외부통계'라는 파일 열어보시면 돼요. 그거 일단 보시고 궁금한 거 확인하시면서 이따 저랑 같이 한 번 보내봐요. 내보낼 땐 기관명으로 제목 바꾸는 거 아시죠?"
"네."
"내부 통계는 지난 분기 꺼 보내드릴게요. 이번 분기 껀 아직 안 해도 돼요."
"유빈님은 첫 회사죠?"
"네엣."
"전략처 신입은 항상 회의 자료부터 시작해요. 프린트아웃용 자료 1, PPT용 자료 1. 일반적으로 각 처에서 보내주시는 자료는 이렇게 두 개예요. 우리 회사는 주간회의가 매주 월요일이고요. 매월 첫째 주 월요일에는 주간회의 대신 월례회의라고 해서 큰 회의가 열려요. 공식 명칭은 '경영 전반에 관한 월례회의', 어르신들은 '경전 회의'라고도 하세요. 프린트아웃 자료는 따로 받지 않고 PPT 자료만 받아서 그걸 프린트아웃으로 써요. 이때는 지방 본부에서 다 올라오시기 때문에 특히 주의해야 돼요."
최사원은 막상 분장을 받고 보니 꽤 큰 일인 것 같아 일을 잘못 받았나 싶다. 하지만 업무 자체는 취합 업무다. 허들이 높지는 않다. 당장 주무관과 숫자를 주고받아야 하는 강사원에 비하면 다행이다.
'어차피 자료는 들어온 걸 모으기만 하면 되니까...'
"회의 자료 마감이 금요일 17시예요. 목요일 아침에 모든 처에 제출 알림 메일 보내시고, 금요일 13시에 마감 알림 메일 보내세요. 그리고 금요일 17시에 마감 알림 메일 한 통 더 보내시고, 마감 이후에 나가는 메일은 독촉 메일이 되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주무인 사람이 알아서 하면 돼요. 저는 주로 메일 드리고, 전화드리고, 결국엔 가서 받아오고요. 각 처 회의 자료 담당은 처의 막내일 확률이 높아요. 동기 분들 계시니 소통하기 좀 편하실 거예요. 인사에 우리 업무 분장 작성해서 보내면 아마 오늘 중으로 새 업무 분장 공문 뜰 거거든요. 그때 각 처 담당 확인하세요."
"..."
최사원의 뇌가 잠시 로딩 중이다.
"...보, 보통 일이 아니네요. 이걸 매주 해요?"
"네, 맞아요. 오늘은 목요일이라 자료 제출 안내 메일은 이미 보냈어요. 이따 퇴근하기 전에 연습차 한 번 더 알림 메일 보내봅시다."
"옙"
"14시에 통계자료 나가야 해서 그거 나가고 나서 유빈님은 저랑 같이 장 보러 가요."
"네?"
"회의용 음료랑 다과 사야죠."
"...아."
의아하다는 듯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며 실례한 아이처럼 우물쭈물하는 최사원이다.
"왜 그러세요?"
어렵게 입을 뗀 최사원의 입술을 타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흘러나온다.
"회사에 비서님 계시잖아요."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구름
<전략처 송과장> 나대면 곤란하고말고
회사가 커가니 이 놈 저 놈 줄줄이 오는 놈들마다 보통이 아니다. 일은 좀 쉽게 하겠다 싶은데 어설프게 배운 놈이 더 무섭다고 괜찮으려나. 정민이가 아직 4년 찬데 미리랑 내공은 비슷허겄네. 보아하니 나서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고... 두고는 보자고. 그나저나 새미래면 발굴단? 추진실? 그 티에프가 6개월 만에 그렇게 된 건데... 서른다섯에 별 걸 다 겪었구만 그래. 유빈이는 뭐... 멍청하니 애가 마음에 들고.
<전략처 강사원> ...
조용히. 조용히. 여기에서만큼은 조용히 살다 가자. 과장님보다는 대리님과 일한다는 마음으로 없는 듯이 살자. 통계 출입 업무가 긴박하긴 해도 한두 부서만 상대하면 되니까 회의 자료보다는 낫다. 다행이다. 그 자식... 나한테 피해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조용히 살다 가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