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신입과 그냥 신입(후편)
2019년 11월 7일 오후
"액세스공사 아래작대기 경영통계 아래작대기 괄호 191107, 발송."
외부 통계 이야기로 점심 내내 송과장에게 시달린 정대리와 강사원은 입도 안 댄 내장탕의 건더기를 질퍽한 국물 속에 최대한 평평하게 묻어두고, 그의 10분 컷 식사 템포에 맞추어 아무렇지 않게 홀연히 일어선다. 그 길로 사무실로 내달려 정대리가 완성해둔 자료를 강사원의 이름으로 발송한다. 현재 시각 12시 10분. 의례적으로 20분 앞선 11시 40분부터 시작된 점심시간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다.
"우리 이제 '진짜 점심' 먹으러 갈까요?"
정대리는 1층 카페로 강사원을 안내한다. 비공식적인 제1회 여사우 모임이다. 전략처로 발령받고 홍일점으로 3년을 살아온 정대리는 여자 사람과 같이 점심을 먹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뻤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눈부시도록 새하얀 탄수화물을 절규하는 위장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지 않아도 된다. 정체 모를 걸쭉하고 짜고 냄새나는 국물을 10분 만에 마실 필요도 없다. 새로운 식당이 생기면 가보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굳이 '밥'을 먹지 않고 이렇게 커피타임을 가져도 된다. 점심시간을 '점심'시간이 아닌 점심'시간'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미리님, 저 3년 만에 먹고 싶은 거 먹어요."
강사원은 정대리가 커피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정대리의 커다란 스퀘어백은 항상 그윽한 커피 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좋은 원두를 집에 보관해두고 때때로 회사로 가져와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던 차다.
"미리님은 이해되세요? 왜 돈을 주고 동물 내장을 살까요? 아까 그거 털이예요? 융털인가? 어후."
아포가토에 꽂힌 스푼을 조심스레 젓는 정대리의 손끝에서 골든레트리버의 털 같은 부드러운 포말이 퍼져나간다. 강사원은 아포가토로 밥을 대신하고 입가심으로 과테말라산 원두를 선택해 음미하는 정대리가 짠해진다. 나도 이 사람도 이렇게 살고 있다. 먹지 못하는 음식에 돈을 써가며, 누군가의 식사 템포에 억지로 맞추어가며. 그렇게 억지로 억지로 살고 있다.
'돌아왔구나.'
정대리의 모습에 수년 전의 본인이 겹쳐짐을 느낀 강사원은 왠지 부끄러워 아메리카노를 감싸 쥔 손의 방향을 바꿔본다.
"11월인데 벌써 춥네요."
"수족냉증 있으세요?"
"겨울에만 좀 그래요."
"어머, 저도요. 혹시 저혈압이세요?"
"약간요."
"와, 혹시 출퇴근 지하철이세요?"
"네."
"저 작년에 야근하고 막차 타고 집에 가다가 지하철에서 기립성... ."
정대리에게는 달콤한 시간이, 강사원에게는 칼날 같은 현실 인식의 시간이 점심 무렵을 내달리고 있었다.
"다음부턴 저도 좀 데려가 주세요. 저 담배보다 커피 좋아해요."
점심을 먹고 흡연실로 끌려갔던 최사원은 내장탕보다 더 큰 정신적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가족 전원이 비흡연자인 건 이쪽도 정대리와 마찬가지였다. 회의 준비를 위해 맞은편 마트로 향하는 젊은 청년의 웨이브 걸린 헤어에는 자기가 피우지도 않은 담배 냄새가 배어있다. 최사원은 움직일 때마다 어딘가에서 공격해오는 담배 냄새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다. 목도 칼칼하다. 나한테서 나는 냄새라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지나가는 어린아이도, 그 옆의 아이 어머니도 소리 없는 비난을 쏟아붓는 것만 같아 억울하고 부끄럽다.
"어머, 흡연실 따라갔었어요? 저희는 이주무관님 통계 건 때문에 사무실 복귀했다가 카페 갔거든요."
"지나다가 봤어요, 근데 저한테서 담배 냄새가 너무 나서 아는 척 하기가 좀..."
"와, ...진짜 힘드셨겠다."
"처장님도 담배 피우시나요?"
"네, 우리 회사 남자들 중에 비흡연자는 재무처 최과장님이랑, 영업 이대리님이랑, 사공 쪽은 다 안 피우시는 것 같고, 아니다, 거기 처장님은 피우시던가? 아! 감사실은 확실히 다 안 피우세요. 윤주임, 이주임, 소차장님, 감사실장님 다 비흡연이세요."
"아, ...네."
정대리는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하다. 송과장의 방침에 따라 다른 처 사람들과는 어울리기 힘들다. 전략처의 윗분들은 모두 흡연계의 고인물이다. 이럴 때는 남자가 훨씬 불리하다. 담배와 술은 건강이 아닌 의리 문제라고 주장하는 송과장조차 정대리에게만큼은 흡연실 동행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 사원들은 입장이 다르다.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의 압박. 그것이 그들을 자발적으로 흡연실로 인도한다. 정대리는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고는 최사원에게 팁을 준다.
"유빈님, 전략처 뒤에 복도 있죠? 그 끝에 보면 '제2운영실'이라고 있어요. 조직개편 전에 쓰던 방이라는데 지금은 비어있어요. 보통 윗분들이 국회 들어갈 때 거기서 환복 하시거든요. 거기에 옷장이 있대요. 냄새가 너무 힘들면 한 벌 가져다 두세요. 옷이라도 갈아입게. 피부에서 나는 냄새는 씻으면 되니까. 안 가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엄마가 알면 엄청 화내실 텐데."
"그쵸,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저라도 화낼 것 같아요."
두 비흡연자의 흡연에 관한 고찰은 마트의 음료 코너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회의 참석 인원은 각 처 처장님과 차장님 두 분 잡으시면 돼요. 스무 분 정도? 음료는 무탄산으로 종류별 5개, 다과는 곡물바나 쌀과자를 포함해서 대여섯 중류. 물은 당일에 대강당 정수기에서 뜨면 돼요. 대부분 50대 이상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과 고르기 쉬우실 거예요. 월례 회의엔 양을 두 배로 늘리면 돼요."
"네."
정대리는 담배 냄새를 풍기며 열심히 받아 적는 최사원이 안쓰럽다. 마지막으로 일회용 그릇 코너로 간 정대리는 접시 세 묶음, 종이컵 두 묶음을 양팔에 끼고 최사원 쪽으로 돌아선다. 최사원은 정대리가 흡사 칼을 차고 전쟁터로 떠나는 무사 같다고 생각했다.
"그릇, 종이컵은 이 정도 사시면 되고요. 남은 건 공용 캐비닛에 넣어두세요."
이제 장보기의 마지막 관문이다. 뱀처럼 늘어지는 긴 영수증을 세 번 접어든 정대리가 주머니에서 네임펜을 꺼내 몇 자 적는다.
'회의비/ 42,000원 /전략처 최유빈 '
"이렇게 항목 분류해서 상단에 써주시면 돼요. 서명도 '전략처'로 통일하시고요. 기조실에는 재무처가 있으니까 전표까지 치실 필요는 없어요. 여기까지 해서 법카랑 같이 유미님께 돌려드리면 돼요. 간단하죠?"
"아, ...네."
정말 이해한 건지 잘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최사원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카드와 영수증을 건넨 정대리는 유독 요란스럽게 울리는 진동에 신경질적으로 엄지손가락을 펼쳐 잠금을 해제하고 핸드폰을 확인한다. 그리고는 곧 얼굴의 모든 표정이 사라진다.
"내일 약속 없으셨으면 좋겠네요. 우리 처 회식이래요. 기조실장님 모시고."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구름
<전략처 정대리> 어쩌다 여길 왔니
회사를 알아가는 단계의 사람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박주임은 사공처에 있다가 와서 회사 돌아가는 건 다 알고 있었다. 전략처 업무만 인수인계해주면 됐었는데 이번에는 다르다. 인생 첫 사회생활을 이 험한 곳에서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안타깝다. 그룹웨어가 뭔지, 회의가 뭔지, 보고가 뭔지, 공문이 뭔지. 아니, 실이 뭔지, 처가 뭔지, 본부가 뭔지도 모른다. 어디부터 알려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한테는 익숙해져버린 것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내일은 회의 자료 마감일인데 회식까지 있어서 여유 시간이 없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사심위가... 나도 처음 하는 업무라 준비에 시간이 걸릴 테고... 이대리님 건이니까 마감은 제때 해주시겠지. 마음이 바쁘다. 회의도 내가 직접 해버리는 게 더 편할 텐데. 그래도 이 시기를 넘기면 내 인생에서 회의가 빠지는 거니까. 최선을 다해서 알려드리자. 그리고 회의의 늪에서 영영 빠져나오자. 망할 회의! 바이바이. 사요나라. 짜이찌엔.
<전략처 최사원> 망한건가?
회의 자료를 맡았다. 나에게도 업무 분장이라는 게 생겼다. 규빈이한테 업무 분장 수정해달라고 전화했더니 전략은 왜 이제야 분장을 하냐며 따졌다. 유미에게 법카랑 영수증을 주러 갔더니 신경질적으로 잡아채갔다. 오늘 안 사실이지만 회의 준비가 장난이 아니다. 회의실 세팅은 금요일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서 시작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기술 쪽에서 대강당을 쓰면서 배치를 바꿔놓는 바람에 이번에는 시간이 더 걸릴 거란다. 음료와 다과는 미리 누나도 도와준다고 했다. 18층에 분명 비서가 있었는데 왜 이걸 내가 해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회의 자료 제출 안내 메일을 보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메일 형식이 정해져 있었다니. 대괄호 하고 요청, 11월 2주 차 주간회의자료 제출 안내, 띄우고 슬래시 11월 8일 괄호 금, 띄우고 17시까지. 상당히 귀찮다.
'[알림] 11월 2주 차 주간회의자료 제출 안내/ 11월 8일(금) 17시까지'
과장님이 한 자 한 자 띄어쓰기까지 보신다고 하니 써놓고 눈에 익혀야겠다. 원래 주와 차를 띄어쓰던가? 이제 별 게 다 신경쓰인다. 첫 번째 메일을 보내고 나니 대리님께서 전략처에서 주로 보내는 메일을 나와 미리 누나에게 10통 정도 보내주셨다. 갈아 쓰는 연습을 하란다. [알림][요청][긴급][기조실장님전달][공사][공단][기재부][국토부][서울시][기유].
이번 주까지는 대리님이 같이 회의 일을 봐주신다고 하니 열심히 배우자. 메일 한 통 보내는 것도 이렇게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내일은 공문 접수에 대해 대해 자세히 알려주신다고 한다. 오늘까지는 미리 누나가 혼자 공문 접수도 하고 필요한 것은 전체 공람을 돌려줬었다. 빨리 나눠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아까 마트 다녀와서 그룹웨어를 열심히 뒤졌는데 공문 같은 건 찾지도 못했다. 과장님은 틈틈이 사규를 봐두라는데 어디부터 어디까지 보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