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백숙(전편)

2019년 11월 8일 오후

by 선량한해달

"가요 그냥, 다시 들어와야지 뭐."


최사원은 회의 자료 취합의 절정인 금요일을 아무 성과 없이 마무리하고 있었다. 정대리와 함께 09시에 마감일 알림 메일을 발송하고, 13시에 재차 확인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대망의 마감 시간, 17시가 되어 최종 마감 메일을 발송했을 때, 최사원의 수중에 들어온 자료는 감사실과 사회공헌처의 회의 자료뿐이었다. 총 열 개 처의 회의 자료 중 20%만 제시간에 들어온 것이다. 최사원은 완전히 길을 잃었지만 임꺽정 머리를 하고 모니터를 쏘아보며 쇼팽을 치고 있는 정대리에게만큼은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7시 30분이 되자 정꺽정의 피아노 연주가 멈추고 차분한 정대리가 돌아온다.


"두 분, 나갑시다."


정대리가 손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거의 동시에 옆자리 강사원이 짐을 간단히 챙겨 일어난다.

'엥?'


최사원은 당혹스럽다. 아직 회의 자료는 들어오지 않았고 퇴근 시간도 아닌데 어딜 간다는 건가 싶다. 이 불편한 마음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화뇌동하여 모니터는 접었지만 차마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강사원이 정대리를 따라나서다가 마주 앉은 최사원이 얼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멈춘다. 시선은 출입문을 통과하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정대리에게 고정한 채로 나지막이 말을 흘리는 것이다.


"동기님, 아무리 바빠도 카톡은 보세요."


빠른 걸음으로 출입문을 빠져나가는 강사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이 든 최사원은 오늘 점심시간 이후 처음으로 카톡을 확인한다.


'268개?'


그곳에는 점심시간 이후의 기조실장님과 처장님의 동선, 회식 장소 물색과 결정, 예약, 약도, 출발 시간까지 5시간의 사회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유빈님!"


정대리의 목소리와 거의 동시에 강사원이 뛰어들어온다.


"빨리요, 실장님보다 우리가 먼저 가야 돼요."



누구보다 금요일의 찝찝함을 잘 아는 정대리는 엘리베이터에 억지로 몸을 밀어 넣은 최사원의 표정을 살핀다. 어차피 다시 들어와야 한다는 4년 차의 위로가 통할 리 없다. 재킷도 없이 겨우 핸드폰만 건져 밖으로 나온 최사원은 흡사 가출한 말티즈 같은 모습이다. 진짜 강아지였다면 분명 눈밑에는 자줏빛 눈물이 엉겨 붙어 있을 것이다.


"대리님, 저기 오는 택시예요."


세 사람은 강사원이 불러둔 택시를 타고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의 회식 장소로 이동한다.


"이 백숙집은 실장님이 좋아하시는 파절이 명이나물이 나와요. 처장님도 백숙을 곧잘 드시고요. 과장님은 흰 국물을 싫어하시지만 실장님 모시고 회식할 때는 항상 여길 잡으라고 하세요. 실장님 오실 때는 반드시 별실이어야 하고, 아, 콜키지 프리 꼭 확인하셔야 해요. 실장님은 와인을 직접 골라오시거든요."


퇴근 시간 직전의 묘하게 불안한 테헤란로를 달려 도착한 회식 장소는 뜻밖에도 10층짜리 건물의 최상층에 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 백숙집이라며?'


으리으리하고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청잿빛 색감의 신비로운 석조 바닥이 끝없이 깔려있다. 복도의 양 옆에는 유리벽으로 막힌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고운 자갈이 깔린 바닥을 따라 신선한 대나무가 줄을 잇는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로비가 나온다.


"액세스공사 정민이요."


매너 좋은 종업원을 따라 안내받은 별실은 적당한 크기의 바닥이 뚫린 좌식 방이었다.


"겉옷 받아 주시나요?"

"네."

"와인 한 병 가지고 들어올 거예요."

"네, 괜찮습니다."

"나갈 때 택시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시간만 알려주시면 가능합니다."

"네, 매번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새로움을 감지한 종업원의 한 마디가 바삐 지나치려는 정민 대리의 어깨를 붙든다.


"새 얼굴들이 오셨네요."

"아, 네, 앞으로 자주 올 거예요. 신입사원입니다."

정대리와 친분이 깊은 종업원은 두 사원과 눈을 맞추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목례를 한 뒤 명함을 건넨다.


"아직 명함이 안 나와서 죄송합니다. 강미리입니다."

"...아, 최유빈입니다."


이 순간만큼은 저 사람도 팀이다. 정대리와 강사원은 방석 상태와 수를 확인하고 연결된 옆 방의 슬라이드 도어를 열어 다른 식사 팀이 있는지, 옷장이 있는지, 직원들의 휴식 공간이 붙어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체크한다. 정대리는 방을 휘 둘러보고는 최사원에게 다가간다.


"10분 후에 지하 3층에 도착하신대요. 저희는 식기랑 잔 상태 확인할 테니까 유빈님은 주차장에서 윗분들 맞아주세요."

"맞아주는... 그... 그냥 여기로 모셔 오면 되죠?"

"네. 실장님은 이번 주에 기조실 세 처와 회식이 있으셨어서 많이 힘드실 테니까 말 많이 하지 마시고 그냥 편히만 모시면 돼요. 오히려 처장님과 과장님께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시는 게 좋아요. 유빈님이 같이 일할 사람은 실장님이 아니에요."


최사원은 던전 입구 같은 긴 복도를 되돌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검푸른 거울에 비친 노쇠한 소년을 마주한다. 낯설다. 걷어올렸던 셔츠의 소매를 급히 내려보고는 이내 다시 걷어올린다. 하루의 고단함을 담은 셔츠의 구김은 아름답지 않았다. 목젖까지 차오르는 셔츠 단추를 꽉 잠그고 손으로 앞머리를 다잡아 본다. 분명 아침에는 생동하는 따옴표였는데 지금은 불어 터진 라면 같다. 지하 3층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갈수록 마른 땀에 파고드는 바람이 매섭다. 이 찬가? 아닌가? 저 찬가? 최사원의 나 홀로 수수께끼가 진행될 무렵 상부층의 고상한 별실에 기조 실장이 들어선다.


"어머!? 실장님 일찍 오셨네요. 이쪽으로... ."


능숙하게 상석으로 안내하는 정대리의 귀에 송과장의 짧은 음성이 스친다.


"차는 그냥 1층에 댔고, 응? 어후, 날씨 춥다이, 응?"


정대리는 굵은 모래가 날아와 고막을 긁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쩜 사람을 기만하고도 저리 당당할까.' 정대리는 안절부절못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최사원에게 미안해진다. 동시에 송과장에게 화가 치민다. 솟구치는 화를 들킬세라 시선은 비스듬히 유지하며 강사원의 옆으로 가 선다.


기조실장의 뒤를 이어 강처장, 송과장이 입장하는 사이 강사원의 빠른 손이 지하 던전의 최사원을 소환한다. 사람 수에 맞추어 미리 주문해둔 백숙이 카트에 실려 이동하는 동안 최사원은 꼭대기층에서부터 유독 느린 속도로 하나씩 떨어지는 엘리베이터 외부의 숫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 놈 하나 있다 그러지 않았어? 서울대."

기조 실장의 의문에 강처장과 송과장이 일제히 정대리를 바라본다.


"최사원은 앞치마 준비가 늦어 가지러 갔습니다. 금방 옵니다."


강사원의 도움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막이 오르듯 온기가 넘치는 백숙 카트와 함께 앞치마를 양손에 든 최사원이 나타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정대리는 두 사원의 혁신적인 콜라보에 감탄하며 가쁜 숨을 억지로 참고 있는 최사원을 바라본다. 최사원의 콧구멍은 한참 전에 지나쳐버린 이산화탄소의 수용 한계를 급히 회복하고자 요동치고 있었다. 정대리는 안타까운 그 모습에 그만 눈만 웃는 울상이 되어버린다. 기조실장은 부드러운 삼향과 파절이 명이나물에 눈과 코를 빼앗겨 어린 사원들의 애잔한 사연을 알아채지 못했다. 앞치마를 챙겨 온 막내 사원이 기특할 뿐이다. 잠시 후 앞치마를 받아들고 짧게나마 감사 인사를 건네고 싶은 서투른 아저씨의 입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자네는... 곱슬인가?"



2019년 11월 8일 금요일 비


<14기 신입 단톡방(15)>

(전략 최유빈)

회의자료 좀 빨리줘 뭐해 ₃


(사공 윤인혜)

보내쓰~ ₃


(인사 김규빈)

ㅅㅂ 조직도 또야 ₃


(전략 최유빈)

규비나 듣냐? 우리 오늘 회식이라고 빨리 ₃


(인사 김규빈)

ㅅㅂ 조직도.. 회의자료고뭐고 씨 ₃


(재무 유미)

회식... 전략도 죽으러 가네 실장 미친새* 개더러워 ₄


(영업 최단)

얘드라 여기 다 미쳐써 살려죠 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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