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왜 나오셨어요?"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점심이 지날 무렵 사무실에 도착한 정대리는 뜻밖의 최사원을 마주하고 놀란 눈치다. 최사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대리님, 회의 자료 다 들어왔습니다."
"정말요? 영업도요?"
"네, 어제 23시 59분에 들어왔더라고요."
"어머, 유빈님, 업무 분장이 잘 맞으시려나보다. 날짜 안 넘기고 준 적이 거의 없거든요."
"이로운 대리님이 보내주셨습니다."
"역시! 로운 대리님이랑 친해지세요. 윗분들끼리 사이가 안 좋으셔서 이대리님 없으면 일 못해요."
"넵, 인쇄도 마쳤고요. 다과 세팅은 이런 식이면 될까요?"
"네, 좋아요."
정대리는 회의실 배치도를 한 장 뽑아 최사원에게 들리고는 캐비닛을 열어 미리 사둔 음료를 꺼낸다.
"가죠."
무겁게 닫힌 대강당의 정문을 서서히 밀자 안과 밖의 공기가 교차한다. 쿰쿰한 카펫 냄새가 올라온다. 시골집에 온 것처럼 포근하다.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실 세팅 인수인계가 시작된다.
"지난 주랑 같아요. 데스크 배치는 그림대로 하시면 되고요, 각 데스크에는 마이크를 설치해요. 이런 마이크는 청문회 할 때 보셨죠? 여기 하단 버튼을 누르면 빨간 불이 들어와요. 이게 작동 중인 거고. 다시 누르면 꺼지고요. 선은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연결하시는 게 쉬워요. 멀티탭은 세 개가 필요해요. 스크린 옆 수납장에 보관하시고요. 무선마이크 옆에 있는 멀티탭은 고장 난 거니까 그냥 두세요. 총무에서 무선마이크 수명 다되면 같이 수거한대서 둔 거니까요. 무선 마이크는 두 개. 사장님 앞에 하나, 감사님 앞에 하나 놓아드리면 돼요."
약 스무 개의 마이크를 설치하고 하나하나 테스트하는데만 30분이 소요됐다. 이후 각 데스크에 펜접시와 자료 고정용 파일을 올리고 사장님과 감사님 자리에는 독서대를 놓는다. 다과와 음료를 올려 마무리하기까지 총 1시간 17분. 최사원은 이제 이 과정을 혼자서 해내야 한다. 각 처의 회의 자료 취합은 업무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번의 회의를 준비하는데 최소 삼일이 걸린다. 이 업무는 시간 안배가 필수적이다. 잘하면 티가 안 나고, 못 하면 티가 확 나는 가사일과도 같은 속성을 갖고 있다. 최사원은 루틴화 되어있는 정대리의 회의실 세팅 동선을 영상에 담는다. 수십 줄의 마이크 선들이 다발을 이루어 곧게 뻗어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사공, IT, 기술처장님은 항상 미지근한 물을 찾으세요. 처음에는 맞춰드렸었는데 안 한 지 몇 달 됐어요. 하다 보니까 이것까지 하는 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정수기가 코앞인데 드실 분들이 알아서 떠드셔야죠. 이제 유빈님이 담당이시니까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나가세요. 내가 지치지 않도록."
최사원은 정대리의 조언에서 팁을 얻는다.
'그럼 나는 다시 챙겨 드려야지. 미지근한 물 셋!'
기왕 하는 거 특급호텔의 완성도 높은 연회처럼 해보자는 심산이다. 물 세 잔정도 뜨는 게 뭐 대수라고 싶다. 소중한 주말에 단 몇 시간의 희생으로 회의 준비가 끝나다니. 익숙해지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뿌듯함이 살짝 밀려들어 기분이 좋다.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가 되자 괜히 나왔나 싶기도 하다. 광활한 대강당을 둘러보며 이제 이곳이 내 업무의 장이 될 곳이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서 연수를 받던 도입 연수생이 2주 만에 어엿한 실무자가 된 것이다. 최사원은 잠시 벅차오름을 만끽하기로 한다.
"유빈님? 이 회의 자료, 혹시... 보셨어요?"
감상에 젖어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최사원은 영문 모를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심각한 표정의 정대리가 인쇄된 회의 자료 한 부를 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고 있다. 회의 자료를 빠르게 훑는 정대리의 모습이 마치 탁구 대회에서 공을 쫓는 관중 같다. 고개가 좌우로 일정하게 움직인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정대리는 새끼 고양이처럼 동그란 눈을 하고 옆에 바싹 붙어있는 최사원을 바라본다. 어디부터 알려줘야 할지 난감하다. 한 번 웃고는 머릿속으로 할 말들을 정리해본다.
"어..., 과장님이 사규 보라고 하셨었죠? 혹시 직제 규정 보셨어요?"
"네, 다 봤습니다."
"회의자료는 전략처부터, 재무, 인사, 사공 순으로 정렬하셔야 해요. 자료가 들어온 순으로 배치하는 게 아니에요. 기술, 안전은 서체가 다르네요. 글자 크기도 처마다 다 다르고요. 여긴 사진이 박스의 한쪽으로 쏠렸죠? 영업처는 우리가 쓰지 않는 특수기호를 많이 쓰셨네요. 이런 건 다 수정해서 재배치하셔야 돼요. 큰 테마는 동그라미, 작은 테마는 작대기, 필요 없는 건 문맥을 고려해서 삭제 및 축약. 축약하면 의미가 변하는 경우가 있어서 담당자에게 일일이 확인해야 하고요."
"제가요?"
뜻밖의 반응에 고개를 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약간의 시간이 멈춘다. 정대리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구두점은 이렇게 사용하는 게 아니죠? 마케팅은 문장이 기네요. 쉼표가 들어갈 정도면 줄이세요. 명사 뒤에 마침표 찍힌 곳도 많고요. 이런 건 다 지우셔야 해요. 그리고..."
최사원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다량의 정보를 토해내는 정대리의 입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본다. 이걸 왜 내가 다 고쳐야 한단 말인가. 애초에 작성하는 사람들이 해서 주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괜히 임의로 수정했다가 내용이 달라지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내 일의 경계가 흐려진다. 분명 내 일은 회의 자료를 취합하고 회의를 진행하는 일일 터다. 정대리는 혼란스러워하는 최사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유빈님. 충격받지 말고 들어요. 그... 그게... 이게 되게... 제일 중요한 거거든요."
정대리는 최사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뜸을 들인다. 이 말을 굳이 해야 아는 건지, 진정 말해주지 않은 내 잘못이었던 건지. 혹시 이걸 말했을 때 상처 받지는 않을는지. 아니면 혹시 단순 편집 실수인가? 정대리는 설마 이런 실수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최사원은 뭐가 또 있나 싶어 한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이 회의 자료... 전략처가 빠졌는데요?"
"네. 전략처는 아직 보내주지 않으셨잖아요."
"네?"
"...네?"
"회의 담당... 이시잖아요. 쓰셔...야죠. 유빈님이."
"...제가요!?"
"네?"
"...네?"
정대리와 최사원은 눈을 맞춘 채로, 서로 영문을 모르는 채로 한참을 마주 보고 서있었다.
2020년 11월 9일 토요일 구름
<전략처 정대리> 내가 어땠더라
선배 구실 하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유빈님은 여기가 첫 직장이다. 너무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는지 정리해봐야겠다. 입사한 지 몇 년이나 됐다고 신입 때 기억이 다 사라졌네. 내가 뭘 몰랐었더라? 뭐가 어려웠었지? 그때 신이형이 뭘 가르쳐줬지? 딱히 뭘 가르쳐주지는 않았었는데... 사람들 얘기를 많이 해줬고... 자료 돌려막기랑 윗 양반들 연차 때 맞춰서 자료 대충 문지르기랑... 터져 나오면 덮기... 더 터져 나오면 바르기... 아... 이건 아니다.
<전략처 최사원> ...
1. 큰 꼭지-동그라미, 15포인트, 신명조/ 작은 꼭지-작대기, 13포인트, 신명조/ 부연-별표, 11포인트, 돋움
2. 한 줄을 넘지 않도록, 부연은 없을수록 좋음, 명사형 어미
3.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각 처 담당에게 문의
4. 문단 설정된 자료는 풀고 재정렬
5. 반스페이스 지양
6. 전체 자료의 모양 고려- 줄 길이, 줄간, 자간 등
할 게 너무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혹시 신입이라고 엿 먹이는 건가? 비서가 있는데 왜 회의실 세팅을 내가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고, 우리 처 자료를 내가 쓰는 거면 그것만 쓰라고 하던가... 알려주지도 않아놓고 "쓰셔야죠오?". 회의 자료 취합이 업무 분장이라더니 회의 관련된 건 무슨 나 혼자 다 해? 미친 거 아닌가? 그럼 지는 뭐하고? 지난주에 써뒀던 게 있으니까 약간만 변형해서 쓰라고 인심 쓰듯 말하는 거... 하, 그럼 인쇄하기 전에 미리 주던가.
게다가 내가 다른 처 업무 내용을 어떻게 안다고 마음대로 줄이라는 거? 처음에 내가 한 거랑 별반 다른 것도 없구만 지맘대로 빼고 줄이고 "이렇게 다르죠오?". 내가 담당인데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쳐놔서 다른 처에서 항의하면 욕은 내가 먹을 거 아냐. 어이가 없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자료 받아서 우리가 다 쓰지 왜 써달라 그래? 그러니까 다른 처에서 욕을 하지. 주말 20시 퇴근이 말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