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리 여기 향수 좀 뿌려보고, 응?"
강처장 대신 회의에 들어가는 송과장이 자연스럽게 정대리의 향수를 탐한다. 정대리는 이제 싫은 내색을 하기에도 지쳐 물 흐르는 듯이 치익 하고 세 번에 나누어 향을 분사한다. 한 때 정대리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이 향은 중성적이고 시원한 잎사귀 향이다. 정대리는 약 세 달에 걸친 시향 끝에 선정한 나의 향기를 이런 식으로 강탈당할 줄은 몰랐다.
기타공공기관에 머물던 시절이 좋았다. 준시장형 공기업으로 지정되며 회사의 입지가 변하자 전략처의 대외 활동이 잦아진 것이다. 강처장 혼자서는 대외 업무를 쳐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송과장까지 대외 업무에 가세하게 되었다. 디테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송과장은 이제 작은 것까지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송과장에게 처음 향기의 중요함을 일깨워준 것은 강처장이었다. 세종 출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거, 너무 꽃냄새 아이가? 물로 본데이."
송과장은 아내가 고른 섬유유연제 향으로 뒤범벅이 된 셔츠를 지적받고 나서야 강처장의 동물적 감각이 가득 담긴 향수를 인식했다. 탑노트고 뭐고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강처장에게서는 표범 같은 향이 풍긴다. 이 날까지 한 번도 향을 신경 쓰며 살아본 적 없는 송과장이었다. 그에게 좋은 냄새란 막 씻고 나온 어린이들에게서 나는 비누향 정도였다. 강처장의 노골적인 지적이 있은 후로 며칠을 고민하던 송과장이 발견한 것은 바로 옆자리 정대리의 향수였다.
새벽 여섯 시, 소회의실에서 대충 자고 일어나 텅 빈 사무실로 걸어 나온 송과장의 눈에 정대리 자리에서 빛나는 시퍼런 유리병이 포착된 것이다. 송과장은 슬쩍 주변을 살피며 홀린 듯 정대리의 자리로 향했다. 안경의 중앙 지지대에 구부린 검지 손가락을 대고 코를 한 번 킁 하더니 살짝 밀어 올린다. 희번덕이는 눈이 마치 문화재를 탐하는 도굴꾼 같다. 어색한 손짓으로 향수병을 감싸 쥐고는 꾹 눌러본다. 엉뚱하게도 분사구를 확인하지 않아 향수액이 그대로 병을 움켜쥔 손에 고여 흘러내린다.
'이거 향이 뭐 이래?'
손을 툭툭 털며 화장실로 가서는 스미는 향을 세 번 정도 씻어낸 송과장은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손에서 나는 의외의 향을 마주했다. 이따금씩 주변에 맴돌던 시원한 수풀 향이다.
'아, 이게 정대리 향이었구먼!'
송과장은 가끔 머리가 맑아지는 향이 주변을 맴도는 걸 느꼈었다. 솔향인지 박하향인지 꽃향인지. 은근한 향기가 코를 침범하곤 했었다. 그 향이 바로 정대리의 향이었던 것이다. 그날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한 정대리는 묘하게 다른 위치에 놓인 자신의 향수병과 잔향이라기에는 짙은 '내 향'이 주변 사방팔방에서 공격해옴을 느끼고는 몸 안에서 차오르는 상당한 분노와 약간의 살의를 감지했지만 송과장은 이미 정대리의 향을, 아니 정대리가 고른 사소한 액세서리 하나를 공유하기로 마음먹은 다음이었다.
"과장님, 이거 여자 향순데요."
"됐고."
"퍼퓸이 아니라서 향이 오래 안 가요."
"여의도가 멀어? 세종 금방 가자네."
간접적인 거절 정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양반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정대리는 나만의 향을 찾기 위해 고생한 지난 세 달을 가슴에 묻기로 했다. 기껏해야 돈 십만 원짜리 향수다. 반 이상 썼다. 첫 병이다. 아직 내 향이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게 억지로 차오르는 분노를 달랬던 것이다. 이제 두세 번만 더 사용하면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액체가 담긴 병이 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향수 셔틀'도 끝이 보이는 것이다. 다행히도 정대리는 이미 새로운 '내 향'을 찾았다. 이번에는 송과장이 거들떠보지도 못하도록 조금 더 꽃향이 강한 향수를 골랐다. 회의 준비로 바쁜 최사원에게 애증 어린 마지막 한 방울을 건네본다.
"유빈님 이거 쓰세요. 향이 좋아야 회의도 잘 풀리죠."
"아, 감사합니다. 크, 역시 대리님!"
최사원에게 전달된 향기를 마지막으로 명확이 빈 병이 정대리의 손으로 돌아온다. 시원한 해방감이다.
"어허, 아까 마이 잘못 가져왔네. 여기다 뿌려보고, 응?"
예기치 못한 송과장의 태클이다.
"향수 다 썼어요. 여기요. 뿌려보세요. 한 번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빈 병을 건네는 정대리의 손을 지나 송과장의 짧고 퉁퉁한 팔이 모니터 앞의 새로운 핑크색 병으로 향한다. 정대리는 짧은 팔의 민첩함에 무척 당황하며 강한 살의를 느꼈다. 더 이상은 안된다. 내 향을 더 이상 남과 공유할 수 없다. 이 꺼림칙한 사람이라면 더욱. 정대리는 서늘한 무표정으로 송과장보다 먼저 향수병을 짚는다. 송과장의 바삐 뻗은 손이 미처 병에 닿지 못한 그 순간, 강렬한 고양이 향의 악력 좋은 손이 송과장의 팔꿈치를 잡았다.
"이거 이거 완전 현행범이시네. 이거 성희롱인데."
"지아... 주임?"
송과장과 정대리와 이주임이 한 곳에 모였다. 최사원은 이 신선한 조합에 잠시 회의 자료를 인쇄하던 손을 멈춘다.
"19층 오랜만에 왔더니 별 걸 다 보네, 과장님."
송과장은 땀이 삐질 난다. 태초부터 감사실 사람을 마주하기 힘든 천성이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감사실에 불려 다니는 입장인 송과장은 이주임을 대하기가 무척 어렵다.
"정민 대리님, 대리님도 싫다고 표현 명확히 하셔야죠. 바봅니까? 왜 내 향수에 손대냐. 내 향수 냄새는. 나! 내 남친! 내 남편! 내 새끼! 한테서만 나야 된다! 그렇게 똑바로 말해야 알아듣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최사원은 왜 18층 비서가 정대리에게 저토록 큰 목소리로 무안을 주며 화를 내는지 당혹스럽다. 내 상사에게 18층 비서가 대든다? 회의실 세팅도 지가 해야 할 걸 내가 하고 있는데? 최사원은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의 자료를 내려두고 한 발짝 정대리 쪽으로 다가선다.
"...거, 늦어... 늦겠다, 유빈이, 응? 들고 따라오고."
최사원은 포부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이주임을 힐끗 보고는 뒤뚱거리며 회의실로 향하는 송과장의 뒤를 쭐래쭐래 따라나설 뿐이었다.
"온니, 나 잘했지? 크, 저 인간한테서 언니 냄새나는 거 싫단 말이야."
"난 오죽하겠니..."
"언니 그러지 말고 그룹웨어 신문고에 써, 어차피 내가 제일 처음 본다니까 뭘 그렇게 망설여? 저 정도면 저거 무의식이야. 못 알아들어. 언니 펜도 몇 개나 뺏겼잖아. 사비로 산 거 다 뺏기지 않았어?"
"정확히 말하면... 내가 포기했지. 남의 손 탄 거 쓰기 싫어서."
"그게 그거지. 저거 더 심각해진다. 저런 인간들은 에스컬레이터라고. 전에 미래씨도..., 에이, 아니다."
말이 헛나왔다는 듯 멈칫하는 이주임이다.
"전략 떠나면 신고할게. 여기 있는 동안은 못 하지..."
"에휴, 전략에 새로 온 놈도 제정신 아니던데 어째 주변에 이상한 놈들만 있어?"
"누구? 유빈님?"
"뉴규우? 유빈뉨? 이러고 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내가 쟤 입사 때부터 지켜보고 있는데, 저거 또라이야. 조심해. 저런 놈들이 본색 드러내면 팀 말아먹지."
이주임은 송과장을 따라 바삐 멀어져 가는 최사원의 뒷모습을 흘겨본다. 오른손 검지를 펴 까딱까딱 팔짱 낀 왼팔에 부딪친다. 단단히 심술이 난 모양이다. 정대리는 그런 지아 주임이 귀엽다.
'헷.'
갑자기 정대리 쪽으로 돌아선 이주임은 밝고 화창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젤리 두 봉투를 남기고 떠난다. 그 뒷모습이 알싸한 생강꽃향을 흩뿌린다.
'그래, 이게 우리 지아 향이지.'
신선한 생강향과 이국의 꽃향과 딸기 젤리향이 제 향을 강탈당한 정대리를 절묘하게 위로하고 있었다.
2020년 11월 11일 월요일 구름 뒤 갬
<14기 신입 단톡방(15)>
(전략 최유빈)
규비나 18층 비서는 뭐하는 사람이야? ₂
(인사 김규빈)
18층 비서? 누구? ₂
(전략 최유빈)
왜 있잖아.. 이지아? 파마 단발 ₂
(인사 김규빈)
아아아 이주임님? ₂
18층 엘프 ₂
(전략 최유빈)
예쁘긴하짘ㅋㅋㅋ 위아래가 없어서 그렇짘ㅋ ₂
(인사 김규빈)
거긴 감사잖아 ₃
(전략 최유빈)
비서잖아 ₃
(인사 김규빈)
뭔솔 이주임님 4년차 아냐? 그 기수 이번에 승진 년차잖아 ₃
(전략 최유빈)
뭔 소리야 같은 사람 말하는 거 맞아? 우리 교육받을 때 물 주던 예쁘장한 애 ₃
(재무 유미)
쟤 뭐래 ₃
(인사 김규빈)
전략은 조직도 안 줘? 비서는 공석이야 지금 ₃
(전략 최유빈)
그럼 왜 비서실에 있어? ₃
(영업 최단)
너 미쳤냐? 너네 대리님이랑 한 기수 차일걸? 거긴 이번 연말에 대리 승진 확정이쟈나 ₃
(인사 김규빈)
유빈이 아무것도 모르네. 미리 누나 쟤 신경 좀 써줘요. ₃
(사공 윤인혜)
우리 유비니 이미 감사실에 찍힌 듯... 아까 지아 주임님이 너네 대리님한테 뭐라뭐라 하더라고 ₃
(전략 최유빈)
이녜 누나 뭔 소리야? 그럼 그 사람도 공채 출신이야? ₃
(사공 윤인혜)
넌 망해써... 너 유독 그 사람한테 그러더라, 회사에서 그러면 안되지 ₃
(재무 유미)
너 처음부터 좀 이상하게 굴었어 ₃
(인사 김규빈)
...퇴사각 ₃
(전략 강미리)
운동하느라 늦게 봤습니다. 죄송해요. 유빈님 내일 얘기해요. 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