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사와 감사

2019년 11월 12일

by 선량한해달

"여기요. 조직도에 사진 없죠. 내선 번호도 없고."


조직도의 비서실을 가리키는 강사원의 손끝이 매섭다. 최사원은 어렸다. 어린 마음과 태도로 사람을 판단해버렸다. 동기의 피와 땀이 수놓인 조직도를 볼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어린이의 핑계다. 강사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비서실에는 명확히 공석이 있다.


'대표이사 - 비서실 - 비서실장 양기동 - 차장 김수철 - 과장 정우석 - (공석:겸직) 주임 이지아'


강사원은 이번에는 감사실을 가리킨다.


'감사 박정두 - 감사실장 유재희 - 차장 소명호 - 주임 윤기택 - 주임 이지아'


"누나, 그럼 비서님이 우리 선배님인 거예요?"

"비서님 아니고 주임님이요."

"아. 네. 주임님."


최사원은 여전히 주임님이 입에 붙지 않는다.


"아니, 그럼 왜 이주임님이 비서를 하는 거예요?"

"...비서가 공석이니까요."

"아니, 사람 많잖아요. 왜 공채 사원이 비서를 해요?"

"...비서도 우리 회사 직무니까요."


강사원은 최사원의 편견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잠시 생각을 한다. 드라마? 영화? 만화? 이미 본인의 현실에서 4년 차 선배가 비서로 겸직 발령을 받았음을 모두가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서라는 직무는 공채 사원의 직무다. 왜 이 한 사람만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걸까. 답답하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그 사람이 비서래요? 이상하잖아요."

"저는 안 이상한데요. 공석을 메워야 하는 시기에 우연히 눈에 띄었다거나. 대표이사실이 있었던 18층에서 제일 굴리기 좋은 막내였다거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감사실이 18층이었대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 거 알면 나도 좀 알려줘요. 누나."


강사원은 고개를 돌려 눈을 잠시 감더니, 혀끝을 왼쪽 입꼬리 안쪽에 갖다 댄다. 콧숨을 내어쉬고는 감사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유빈님. 감사실은 독립기구예요. 우리를 '감사'하는 곳이라고요. 당연히 일반 부서들과는 떨어져 있어요. 같은 층이라면 복도를 한참 돌아가서 따로 있거나 해요. 누가 감사실에 드나드는지 다 보이면 되겠어요?"


강사원은 재무처 옆 가벽으로 둘러싸인 감사실 쪽으로 고갯짓을 한 번 하고는 최사원을 똑바로 바라본다.


"저 위치에 감사실이 있는 게 이상한 거예요. 임시거나, 회사 내부에 문제가 생겼거나. 사람들 말 들어보니 공사 때문에 임시로 옮긴 거래요. 곧 원래대로 18층으로 내려갈 것 같아요."

"그럼 비서는 언제 뽑는대요?"

"..."


자꾸 대화가 끊어진다. 강사원은 주고받음이 성립되지 않는 이 대화가 힘들다. 이제는 마무리를 짓고 싶다. 길어져서 좋을 것 없는 대화다. 애초에 '아, 제가 잘못 알았네요. 감사실 선배님이셨구나.'로 끝나면 그만일 대화였다.


'혹시 얘는 대표이사와 가장 근거리에서 일하고 싶은 건가?'


"유빈님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해요? 비서실에 관심 있어요?"

"아니, 누나 솔직히 회의실 세팅하는 거 너무 시간 낭비고 힘들거든요. 내 일도 아닌데 비서님이 계시면..."


'아, 그랬구나...'


강사원은 동기라기엔 너무 어린 최사원의 모습에 불현듯 짜증이 치고 오른다. 조용히 머물다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이 어린놈이 여기저기 미운 씨앗을 뿌리고 다니는 통에 인생 계획에 큰 오차가 생기고 있다. 대체 이 사람 머릿속은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원래 이런 사람인 건지, 단지 어린 건지. 생각해보면 스물여덟의 어린 나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 사람이 이상하다. 이 불만투성이 어린이의 머리를 갈라 뇌를 꺼내 탄산수로 씻어버리고 싶다. 만약 얘가 내 아래로 들어왔다면 어땠을까? 안 된다. 이러면 안 된다. 동기다. 나도 신입이다. 참자. 참아야 한다. 조용히. 조용히 다녀야만 한다.


"유빈아."

"네?"

"회의실. 그건 니 꺼야."


절대 말을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강사원이 말을 놓는 순간이었다.


"새 비서님이 오셔도 그건 니 꺼라고. 조직도에서 비서실 선 따라가 봐. 대표이사 직속으로 선이 빠져나가 있지. '대표이사' 비서야. 사장 비서라고. 기관장 비서. 전략처 비서가 아니라. 그래서 위치도 다른 처들 위에 떠있는 거야. 대표이사와 감사. 그 둘이 동급이야. 대표이사 아래에 비서실이랑 그 외 다른 처들이 있고. 감사 아래에는 감사실이 있고. 그래서 감사는 다른 처들과는 좀 달라. 거긴 수장이 대표이사가 아니니까. 우리 대빵은 대표이사, 저쪽 대빵은 감사. 같이 사무실에 있어도 같은 사무실이 아닌 거야."


강사원은 왜 정대리가 이토록 중대한 사실을 최사원에게 가르쳐주지 않는지 원망스럽다. 신입이 신입에게 회사 사정을 알려주는 모양새가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강사원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싶었다. 조용히 다니다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면 최사원과 자연스럽게 떨어질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 어린이는 입이 가볍고 불만이 많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전략처의 버릇없는 신입을 주목하고 있다. 덩달아 강사원까지 얽힐 위험이 있다.


"회의실은 니 꺼고. 통계는 내 꺼고. 사심위는 대리님 꺼고. 업무 보고는 과장님 꺼고. 대외 협의는 처장님 꺼고. 자기 꺼 남 꺼. 그건 알고 살아야 돼. 그게 감사받을 때도 제일 중요한 거야."

"..."

"그리고 우리 같은 막내가 누굴 함부로 말하면 안 돼. 너한테 '물 주던 예쁘장한 애'라고 불릴 사람은 이 회사에 한 명도 없어. 그리고 그렇게 부를 사람 이제 안 올 거야. 통계 보니까 계약직이 두 분 계셨더라. 대표이사 비서 직무로. 계약직이 있으면 우리 경평 점수 깎여. 경평 등급 못 받으면 돈이 깎여. 우리가 국민을 위해 일할까? 경평 점수받으려고 일하지. 정부가 정규직 전환에 집중하는 건 알지? 우리 이제 기타 공공기관도 아니고 제대로 공기업이야. 통계에 계약직 수가 잡히면 되겠어? 지난주에 내가 주무관님한테 보낸 거. 그거 이번 분기 정원이랑 현원이야. 적어도 이번 분기에는 별도 채용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없게 해야지. 그래야 입지 애매한 우리 회사가 잘 보여서 공기업으로 살아남으니까."

"..."

"새 사장님 오셔서 개편되면 너나 내가 비서로 갈 수도 있겠다. 이전 회사에서는 여자 하나, 남자 하나 보냈었거든. 지금 전략에 있다고 계속 전략이 아니야. 특히 여기처럼 위태로운 회사는 사장 바뀔 때마다 6급이들 전부 F/A 상태 되는 거야."


최사원은 혼란스럽다. 강사원이 쏟아내는 지식이 한 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받아들이기 버겁다.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분 나쁘다'.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신입이다. 다른 기관에서 일하다 온 건 알고 있다. 대리님보다 경력이 더 길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윗사람처럼 굴 일인가?


'지가 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부드럽게 알려줄 수 있는 부분이다.


'가만, 이거 혹시 직장 내 괴롭힘인가? 따질까? 아냐, 그래도 일단 사회생활은 해둬야지. 내가 참자. 어리니 접고 들어가자.'


마음을 고쳐먹은 최사원은 답답함과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실린 눈빛을 보내는 강사원을 향해 제 딴에는 너그러운 용서를 담아 애교를 부려본다.


"에이, 누나 화났어요? 그러지 마요오. 무섭잖아."




2019년 11월 12일 화요일 맑음


<홍보실 민주임> 새출은 왜 나만 하나

오늘은 또 국토부에서 항공밥 먹던 놈이 온단다. 항공밥이든 철도밥이든 도로밥이든 뭔 밥 먹던 놈이 오든 내 알 바 아니다. 사장 건이니 액세스 뉴스에 1번 기사로 올려서 공람을 걸고... 비서실이랑 감사실 빼고. 음... 감사는 보내도 상관없나? 실장님한테 물어봐야겠네. 전략이랑 마케팅은 다 넣어서 보내주고 나머지는 4번 8번 빼고 보내주고. 내일도 두 번 작업해야 하면 새벽 7시 출근. 하... 맨날 나만 7시다. 때려 치우든지 해야지.


<전략처 정대리> ...

병원에 다녀왔다. 병원 아니면 연차도 못 썼을 텐데... 아파서 다행이다. 사업 심의 규정이 생각보다 디테일이 없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처음 하는 일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변호사님 쪽에 확인하고 녹음하고 몇 번을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내일 커피라도 한 잔 사다 드려야지. 이건 뭐 내가 사심위 규정을 개정할 수도 없고... 규정 자체가 사업을 심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초창기 멤버가 영업이 많았다더니... 나중에 감사 끌려가게 생겼다. 민혁이도 고생이 많았겠네... 송과장... 이딴 분장을 지금 나한테 줬다 이거지? 하... 지난주부터 두통이 재발했다. 약 끊은 지 오래됐는데 다시 챙겨 먹어야지. 살려니 약이 는다. 욕이 는다. 신입은 삐약거리고 아주 미치겠다.


<전략처 강사원> ...

왜 항상 어딜 가나 꼭 한둘은 있는 걸까. 크다 만 사람들이.

이전 17화지아의 역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