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빈님, 회의 자료 제출 알림 보내셨죠? 미리님은 15시 전까지 현장 삼본부 통계 내보내 주세요."
한 주의 절반이 지났지만 전략처의 바쁜 일상은 변함이 없다. 수요일에 끝을 보지 못한 사심위는 다음 주로 연기되어 정대리를 옥죄고 있다. 목요일에 시작되는 회의 자료 취합은 최사원의 공기를 어지럽힌다. 이번 주 들어 세 번이나 들어온 주무관의 긴급 자료 요청은 강사원의 점심시간을 두 번이나 빼앗았다. 두 사원은 입사 2주 만에 처장과 과장의 부재에 익숙해졌다. 차단의 원칙에 따라 강처장은 송과장에게, 송과장은 정대리에게만 업무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전략처의 단톡방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정대리는 송과장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바삐 움직이고 있다.
"좋은 아침, 우리 스마~트한 정대리님 많이 바쁜가 보네?"
갑작스러운 기조실장의 등장에 우르르 일어서는 사람들 속에서 몇 초간 반항하던 정대리도 마지못해 슬며시 일어선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청광 차단 안경을 쓰고, 여전히 눈은 모니터를 주시한 채로 구부정하게 허리부터 일어나는 모습이 애달프다. 안경만 쓰면 정리포터가 되는 정대리다. 매달 이때쯤이다. 잊을만하면 기조실장이 한 손에 잡지 꾸러미를 잔뜩 들고 정대리를 찾는 것이다.
'하, 씨... 또야?'
머릿속 험한 말과는 달리 제법 공손히 잡지를 받아 든다. 재무처와 인사처 사람들도 '아, 또 한 달이 지났나.' 속으로 생각하며 기조실장과 정대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회의 자료 작성과 취합에 정신이 팔려 기조실장을 인지하지 못한 최사원이 뒤늦게 분위기에 눌려 삐쭉삐쭉 일어선다.
"실장님, 오늘은 제가 사심위 연기 건으로..."
"어어어, 알아 알아. 내가 어제 거기 같이 있었는데 뭐. 이건 바쁜 거 아니니까 그냥 대충 해서 지난달처럼 마케팅이랑 기술에 좀 보내줘. 내일까지만. 수고."
옆자리 강사원은 순간 정대리의 핏기 없는 아랫입술이 살짝 말려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기조실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정대리의 손에는 일본어와 영어로 물든 교통 잡지가 들려 있다.
'아...! 이 사람이 이곳의 번역가.'
정대리는 손에 힘이 풀려 잡지 세 권을 데스크 귀퉁이에 던지듯 올려두고 천장을 한 번, 창밖을 한 번 보더니 정면의 재무처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기조실장이 사라지자 주섬주섬 제자리를 찾아 돌아 앉는 그들의 연결된 등이 마치 강력한 방패막 같다.
"미리님,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네."
강사원은 마주 앉은 최사원에게 메신저로 정대리의 부재를 알리고는 멍하니 정대리의 빈자리를 바라본다.
'힘들겠네.'
그래도 이곳에서는 정대리가 이미 '그' 역할을 해주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강사원은 지난날 겪은 허무와 배신감을 떠올리며 자세를 고쳐 잡는다. 오늘 할 일은 모두 했다. 이제 주무관 쪽에 자료 발송 확인 전화만 한 통 넣으면 사실상 업무 종료다. 주무관과 얽히면 좋을 일이 없다. 이 쪽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료 요청을 해대는 통에 이번 주 들어 이미 두 번이나 점심시간을 반납한 강사원이다. 어찌 된 게 공무원이라는 사람들은 밤도 새벽도 없다. 강사원은 이럴 때마다 공무원보다는 공자가 조금 탁해진 공기업이라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한다. 오늘만큼은 내 시간을 뺏기지 않으리라. 눈앞의 최사원은 회의 자료에 정신이 팔려있고, 정대리는 끼어든 잡무로 멘탈이 날아갔다. 윗분들은 부재다. 적당히 일하는 척하다가 일과를 마감하면 될 일이다. 어쩌면 칼퇴도 가능할지 모른다. 강사원의 판타지가 파티션을 넘어설 무렵, 선뜻한 공기가 등을 파고든다.
"우리 우아~한 주현미리씨?"
기조실장이다. 강사원은 데스크를 밀어내듯이 반동을 일으키며 벌떡 일어섰다. 밀려난 의자의 헤드레스트가 불쑥 다가온 잡지 두 권에 가서 힘없이 부딪친다. 이번에는 재무처와 인사처 넘어 사공처 사람들까지 일어섰다. 기조실장의 여유로운 미소가 무척 공격적이다.
"우리 미리씨가 프랑스서 살다 왔던가?"
"아, ...네."
"피~노누아!"
"..."
"어디 이런 큰 인재가 들어왔어 그래.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프랑스와 일본이 중요하지. 이거 번역해서 내일까지 마케팅 쪽에 좀 보내줘요. 그냥 막번역해서 보내면 돼. 정대리가 잘 알 거야. 수고."
기조실장은 용건을 마치고 미끄러지듯 전략처 뒤 복도를 지나 실장실로 빨려 들어간다.
'저 자식은 슬라임인가?'
강사원은 바닥을 한 번 쳐다보고, 창 밖을 한 번 쳐다보고, 눈앞의 최사원을 한 번 쳐다본다. 이번에도 재무처 사람들이 주섬주섬 제자리를 찾아 돌아앉는다. 멍한 눈과 살짝 말려들어간 아랫입술이 목적 없이 정면을 주시한다. 급변하는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양쪽으로 눈을 흘깃대던 최사원은 영 부담스러운 동기의 얼굴에 기어코 한 마디를 보태고야 만다.
"누나, 전 경제학과요."
"어쩌다 프랑스에서 살았어요. 비참하네. 정말."
어쩌다 일본에서 살다와 비참한 생애를 보내고 있는 정대리의 자조 섞인 걱정이 강사원을 향한다. 시계는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강사원은 고개를 들어 사무실 동태를 살핀다. 재무처 엄사원과 사공처 박사원도 남아있다. 이 회사 역시 막내들이 퇴근하기 어려운 구조다.
"말이 막번역이지 막번역해서 저쪽에 던지면 저기선 좋아하나? 마케팅 처장님 사기업 출신이시라 세련된 거 아니면 안 보시거든요."
강사원은 막번역으로 끝낼 수 없는 번역 작업이 매달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감지한다. 윗선과 가까운 처일수록 이런 종류의 잡무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프랑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이전 기관에서도 혹독한 번역가의 삶을 살았던 강사원은 그래도 여기에서는 둘이니 좀 낫겠지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현상의 파악이다. 한탄은 의미가 없다. 이 번역 작업이 전략처 내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대리님, 과장님은 혹시 실장님이 번역 주시는 걸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인짜 진짜 진짜 싫어하시죠. 업무 중에는 펴놓지도 못하게 해요. 끊어주지도 못하면서."
"아..."
어쩜 이리 똑같을까. 강사원은 이곳에서 열린 고생길이 눈에 훤하다. 업무 시간에는 번역 일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야근이 필수다. 야근은 무섭지 않다. 문제는 송과장이 같이 야근을 하는 경우다. 송과장의 눈을 피해 번역을 해야 한다면 송과장의 부재를 기다렸다가 틈을 노려야 한다. 강사원은 항상 팀의 야근이 끝날 무렵 퇴근을 가장해 밖으로 나갔다가 모두의 퇴근을 확인하고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번역을 하곤 했었다. 그 시절의 강사원은 프랑스 출신이라는 절망적인 타이틀 때문에 수차례 눈물을 훔쳤던 것이다.
"제가... 돌아왔네요."
"흐흣."
강사원의 마음의 소리가 무심결에 밖으로 터져 나온다. 정대리에게서는 예상했다는 듯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미리님 진짜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쪽 공사는 여기보다 더 심하지 않았어요? 이 여우 같은 양반들의 근거지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심할지 뻔해요. 어후..."
강사원은 한 문장씩 툭툭 번역을 진행해본다. 대략 다섯 페이지에 한 시간. 광고 페이지를 빼면 총 번역 분량은 약 쉰 페이지. 절대 노동시간 열 시간. 이런 상황에서는 힘을 빼고 최대한 내상을 입지 않은 듯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일까지라... .'
내일 24시까지 남은 시간은 27시간. 그중 출퇴근 두 시간과 수면 시간 다섯 시간을 빼면 20시간. 강사원은 남은 시간의 절반 이상을 이 번역에 매달려야만 한다. 그 시간이 과연 나와줄까? 내일 송과장이 아침부터 나오면 어쩌지? 어쩔 수 없는 불안이 자꾸만 콧등을 간지럽힌다.
"전 두 챕터만 할 거예요."
"네?"
"마케팅 지금 하고 있는 게 미래 기술 관련이거든요. 두 챕터 총 아홉 장만 해서 줄 거예요."
"괜찮을까요?"
"괜찮지는 않지만 괜찮아요."
번역 노예로 3년을 살아온 정대리는 번역용 원페이지 양식을 첨부하여 강사원에게 보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 실장님 있잖아요, 정년 4개월 남으셨어요."
2019년 11월 14일 목요일 구름 뒤 비
<사공처 백과장> 정민일 데려올까
불쌍한 정민씨 인생이 이제 좀 피려나보다. 실장님 보시는 책 절반이 프랑스어일텐데 신입이 좀 힘들어지겠네. 이제 정민씨도 많이 컸는데 다음 조직개편 때 어디로 가려나? 송과장이 차장 달면 과장이 비니까 승진 년차 하나가 이동할 테고, 정민씨가 막내 대리니까 인사나... 뭣하면 우리 쪽으로 와도 되는데. 원래 공시는 전략에서 해야 되는 걸 우리가 하고 앉았으니 전략에서 사람 하나가 오면 그 사람 시키면 되고. 다음 개편 때 분장 째로 돌려보내면 털기 쉬운데 말이야.
<재무처 엄사원> 조직개편만 기다린다
전략은 전략이네. 실장이 까마득한 막내 사원 이름도 불러주고. 친히 나와서 업무도 주고. 미리 언니가 ㅇㅇ공사 출신이랬나? 프랑스에서 살다왔다고? 비밀도 많네. 내 자리에는 유빈이가 제격인데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회사엔 병*들이 너무 많다. 2주 된 나도 실수 없이 전표를 치는데 왜 자꾸 틀리는 거야? 다들 바보야? 틀린 걸 또 틀린다고? 맨날 틀린다고? 몇 년 동안? 미치겠다. 물리적으로 양 많은 거 쳐내는 거 딱 질색인데... 유빈이랑 바꾸면 안 되나? 걔는 대학 때부터 관계 구축도 못하고 머리도 바보라서 어차피 전략일 못 할 놈인데. 곧 사장도 바뀔 텐데 대대적인 인사이동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전략처 정대리> 나 홀로 Part.2
매달 중순만 되면 어김없이 잡지 쪼가리를 들고 나를 찾는 늙은 여우. 저놈도 이제 라스트 4개월이다. 제발 은퇴하고 나서 명예직, 촉탁직 이딴 걸로 돌아오지 말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길 바라고 또 바란다. 예는 갖춰야 하니까 퇴직하실 때 그동안 해왔던 모닝 저주는 내가 예쁘게 풀어드릴게. 번역 일만 없었어도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진 않았을 거다. 미리님까지 외국 살다와서는... 전략처가 무슨 번역 부업처냐고.
<전략처 강사원> 혹시나 하질 말걸...
외국어 하는 죄인. 외국 살다온 죄인. 기조실 죄인. 이건 업이다. 대체 나는 전생에 사람을 얼마나 해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