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백숙(후편)
2019년 11월 8일 회식
'제발..., 그만.'
"그러니까 우리 전략처는 '총괄'부서란 말이지. 최사원 같은 젊디 젊은 친구가 다른 처 차과장 상대하는 겁니다아? 신입 때부터 이렇게 일 많이 배우는 데서 시작한다는 건 아주 큰 메리트야. 송과장, 그래 안 그래?"
"맞습니다. 어디 가서 신입이 전략 못 하죠. 여러분들 잘 들어이. 우리 실장님 말씀대로 여러분들한테는 증말 좋은 기회고, 응? 여기 여 정대리 봐. 말만 대리지 다른 처 과장급이고, 응? 일 하는 건 사실상 차장들만큼 한다고, 응? 이렇게 인정받고 커나갈 수 있는 데가 바로 전략이다 라는 거."
왜 항상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정대리는 취하지 않는 체질을 원망하며 누구보다 또렷한 정신으로 가슴에 꽂히는 장검 같은 칭찬을 전략적 미소와 고갯짓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백숙의 은근한 삼향과 술향이 어우러져 공기가 온화하다. 회식이 무르익고 아저씨들의 성토가 잦아들 무렵 찾아오는 심리적 노곤함이 정대리를 감싸고돈다. 정대리는 감상에 젖어든다. 이 순간만큼은 지긋지긋한 공자 붙은 아저씨들이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다.
실장이라는 사람도 참 딱하다. 어제는 인사처, 그제는 재무처에서 단어만 바꾸어 가며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왜 저 사람은 여기에서 저러고 있을까. 아, 저것도 사람 사는 모습인가? 행정고시 패스하고 국토부에서 뼈가 굵은 양반이 어쩌다 말년에 이 작은 공기업에서 실장을 하고 있는 걸까. 다른 고시 동기들처럼 이 회사 저회사 사장으로 전전하다 정치판의 재물로 사라지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모님께는 한없이 자랑스러운 아들이겠지. 강처장도, 송과장도 저 집에서는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 아들이다. 분명 같은 양을 마셨는데 한없이 꼬꾸라진 눈동자가 애처롭다. 정대리는 술을 좋아는 하지만 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 상사를 보며 알았고, 술을 싫어하지만 말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을 보며 알았다. 송과장의 고개가 툭 떨어진다. 이제 정리해야 할 때다.
'고생했다. 비루한 알코올 쓰레기들아.'
"실장님, 이제 마지막으로 생명수 한 잔씩 하시죠."
"가만, 가만. 내가 와인 자격 가진 사람이야. 정민이는 알지?"
"아유, 그럼요, 실장님께서 우리 회사 유일한 소믈리에 아니십니까."
"이 와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빌 클린턴 대통령이..."
운은 띄웠다. 이제 끝이다. 언제나처럼 와인의 역사를 주워들은 후 잡학도가 0.1포인트 정도 늚에 감사하다 보면 회식도 끝이다. 지난번에는 클레오파트라였는데 이번에는 빌 클린턴이다. 정대리는 다음번엔 아마도 오바마가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하며 식탁 위 핸드폰을 손가방 중앙의 주머니 속 정위치로 복귀시킨다.
"아아, 아니다, 아니다. 모처럼 신입도 왔는데 우리 잔 한 번 돌릴까?"
'?!'
실장의 한 마디에 강처장부터 잔이 돈다. 와인을 매개로 서로의 타액이 섞이기 시작한다. 싫다. 무식하다. 더럽다. 전 사장 퇴진 때 칼바람이 몰아친 후 처음 맞은 회식 자리에서 감사실장 주도 하에 전사원이 소주잔을 돌린 적이 있었다. 정대리는 그 순간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했다. 그리고 딱 8개월 만이다. 잔을 돌리는 역한 풍습은 대체 누가 만들어서 2019년에 다다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 최초로 만든 자를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 마지막으로 최사원에게 잔이 넘어간 순간,
"자자, 오늘은 우리 막내 건배사 한 번 들어보자. 다 같이 잔 채워요."
눈치 없는 강처장이었다. 와인을 마시던 잔에 급히 남은 소주를 나눠 채워 넣는다. 모두가 투명하지도 붉지도 않은 물 탄 김칫국 같은 술잔을 들고, 막내를 압박한다. 정대리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 자리가 혐오스럽다.
"이야, 오늘 실장님 기분 좋으시고, 응? 유빈이 한 번 기똥차게 해 보고?"
"아..., 건배사. 네, 건배사."
최사원은 술기운으로 굳은 뇌를 돌려보려 애쓰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눈치다.
"그..., 그럼 제가 지화자 하면, 좋다 해주십시오! 자아, 지화자!"
"좋..."
"탈락."
강처장의 단호한 심사평에 떼다만 입술들이 우물쭈물 제자리를 찾는다.
"탈락! 유비이 너넌 감각이 읍따. 신입이 그래 쓰나. 우리 미리씨가 한 번 해봐요오."
정대리는 오늘 유독 심기가 불편하다. 지하로 온다던 사람들이 마음대로 1층에 차를 대고 들어올 때부터 어긋났다. 출발부터 가슴이 철렁하며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거기에 깔끔하게 맺지 못하고 질질 끄는 모양새가 거북하다. 내 아래로는 이런 불편한 문화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어쩔 줄 몰라하며 몸을 한껏 찌그러트리고 있는 최사원을 보니 화가 솟구친다. 이제는 안된다. 소중한 내 후배님들을 괴롭히고 있는 저 악마들을 끊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 해야 한다.
'뭐라고 하지? 너무 쎈가? 아니야, 이 정도는 말을 해야 알아듣... .'
"근데, 미리씨는 주현미 닮았네?"
실장의 예기치 못한 한 마디에 갑자기 할 말이 사라진다. 어이가 없다. 주현미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엄마가 좋아하는 낭랑한 목소리의 가수 이름이 일순간 사고의 정지를 불러온다.
"어, 어어, 거래, 닮았다. 코랑 입이, 그채?"
"그러네요, 맞고 맞고,응? 이야, 노래 잘하게 생겼다이."
전의를 상실한 정대리는 맞은편 강사원을 면목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강사원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멍청히 강사원을 바라보던 정대리는 순간 섬찟한 무언가가 안구를 뚫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신이 든다. 시선을 내리깐 모습이 차갑고 무섭다. 표정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큰일이다. 저 사람은. 화가. 났다.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잠깐, 이거 두 개 다 걸리잖아? 망했다. 내가 따라 웃었던가? 아니다. 다행이다. 그러면 방조? 배임? 이 정도면 쎄도 견책 정도로 끝나겠지? 잘못은 저 아저씨들이 했는데 왜 나까지... .'
혼란스럽다. 어떻게 참고 버틴 세월인데. 정대리는 이런 식으로 감사실에 불려 가고 싶지 않았다. 강사원이 내뿜는 원인모를 서늘함에 놀란 것은 정대리뿐이 아니었다. 송과장과 강처장도 때때로 실장의 눈치를 살피며 한 손에 탁한 잔을 들고 곧게 서있는 강사원을 살피고 있었다. 수 초가 수 분처럼 느껴진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도드라진다. 강사원이 입을 뗀다.
"그럼, 주현미로 운을 한 번 띄워 주십쇼."
'?!'
정대리는 흠칫 놀란다. 예상과 다른 전개다.
"이야아~! 우리 강미리 사원 멋진데요? 일단 박수부터 치고요."
여유로운 웃음 속에서 퍼져 나오는 강사원의 서늘한 기운을 감추려 물개 박수를 유도한 정대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오늘 회식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주!"
"주. 체적으로 행동하겠습니다."
"현!"
"현. 명하게 대처하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미!"
"미. 모로 해결해볼게요~, 원샷!"
최악의 마지막 잔을 시원하게 비우는 강사원을 향해 진심 어린 박수가 터져 나온다. 송과장은 만족한 기조실장을 힐끗 보더니 이마까지 빨개져서는 고개를 저으며 키득키득 웃는다. 치아 사이에 끼어 대롱대롱 매달린 쪽파가 참으로 못났다. 정대리는 뛰던 심장이 잠잠해지자 온몸에 힘이 빠진다. 순간적인 기지라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했다. 저 사람은 분명 처참한 회식을 수십 번 겪어온 것이다. 강사원은 희롱 정도는 가볍게 받아 서늘하게 반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오늘 이 자리에 있었던 그 누구도 다시는 강미리라는 사람을 얕보지 못한다. 강처장과 송과장은 원인 모를 땀을 연신 닦아내며 기분 좋게 실장의 뒤를 따라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정대리는 급히 뒤따라 나서며 태연한 강사원과 눈을 마주친다.
"대리님, '전략처/ 회식비/ 6인'으로 쓸까요?"
"...아, 네. ...아뇨, 5인이요. 실장님은 안 오신 걸로. 절반은 실장님 카드로 계산되어 있을 거예요."
"네."
태연히 법인카드를 들고 결제에 나서는 강사원에게서 술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뿌렸는지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이 정대리의 코끝에 멈춘다.
'이 언니는 찐이다.'
2019년 11월 8일 금요일 비
<전략처 강처장> ...
가끔 호랑이 새끼가 굴러들어 온다.
<전략처 송과장> ...
정대리 그 어설픈 게 괜찮으려나. 주현미이? 응? 참 내 어이가 없어서. 저쪽 공사 새미래 티에프라... 하소장, 강처장, 김처장, 홍과장. 그렇게 된 애 둘이 아마 대리였고. 그리고 강미리랑 동기 사원 하나 더 있었지 아마? 이쪽으로 넘어온 인간들이 꽤 많은데... 또 누가 그 티에프를 탔었지?
<전략처 정대리> ...
아효, 아저씨들 데리고 다니기 참 힘들다. 실장이고 뭐고... 본인들 진급 때문에 왜 나까지 이 개고생을 하나. 못 마시는 술은 왜 그리들... 맨 정신으로 못 할 말이면 하질 말든지. 아니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재사회화 과정을 거치시든지.
유빈씨는 너무 취해서 식당에서 바로 돌려보냈다. 애가 참 짠하다. 미리님은 회식 준비도 잘 따라와 주시고, 뒷정리는 거의 혼자 도맡아 해주셨다. 생각해보면 유빈씨랑은 일곱 살 차이가 나는 누님이니 인생 경험치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나보다도 네 살이 많은 언니다.
나이도 나인데 기본적으로 내공이 남다른 사람이다. 든든하다. 나에게도 언니가 하나 생기는 걸까? 지아만큼 친해질 수 있을까? 수습 끝나고 경력 재산정하면 대리는 못 돼도 주임으론 올라오실 텐데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동성 친구가 필요하다. 감사실 지아와는 한계가 있다. 같은 처에 속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힘들다. 힘들었다. 힘들 것이다. 이런 나에게 언니가... 가능할까?
<전략처 강사원> ...
어차피 다 같은 판, 그 나물에 그 밥. 강처장... 당신 여기서도 그렇게 비열하게 살고 있나?
<전략처 최사원> ...
엄마가 때리면서 셔츠와 양말을 벗긴 것 같은데... 몇 시에 들어온 거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 보니 새벽 4시 44분이다. 기분 나쁜 숫자가 소름이었다. 당분간 백숙은 냄새도 맡기 싫다. 하... 회의 자료는 어쩌지? 계산은 누가 했지? 영수증은 받았나?